작별하지 않는다. 1

알아야 한다

by 바비

작별하지 않는다. 1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중략)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초등학교 운동장을 헤매 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로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한강/ p.84>>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술에 눈이 히영하게 묻엉으네......내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한강/p.86>>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할머니가 겪은 전쟁도, 엄마가 겪은 피난 길도 가족을 잃지 않았던 엄마나 할머니에겐 그렇게 참혹한 일이 아니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술도 먹지 않았고 가족들에게 한 번도 화낸 일이 없는 분이었지만, 딱 한 번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었다.


80년대 대학생이었던 오빠가 반정부 시위대에 나갔을 때였다. 마을 이장들은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이들을 빨갱이라고 전했다. 자녀들을 단속하라고도 했다. 동네 바보와 노숙자가 삼청 교육대로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할머니와 엄마와 아빠는 전쟁을 일으킨 빨갱이가 무서웠다. 광주에서의 죽음도 제주에서의 도민 학살도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빨갱이를 죽이는 일은 내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잔인하고 몰인정해도 이는 국가가 대신 피를 묻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살얼음을 낀 얼굴을 닦아내는 열세 살 소녀의 손을, 시체를 보는 눈을 따라 문단을 따라가다가 책장을 덮었다. 벌써 몇 년째 두려워서 책장을 열 수 없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책장을 열 때마다 유리를 긁는 것처럼 가늘고 신경을 거스르고 살갗의 누운 솜털들이 일어나는 울음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문장의 행간마다 소름이 돋았다. 글에서 시체 냄새가 났다. 바닷속에 빠져 죽은 수 백명의 시체를 본 노인이 바닷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는 말에,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은 생선을 먹어왔던 지난날에 토악질이 났다.

3분마다 피가 돌도록 만드는 인선의 주삿바늘처럼 문장들이 아프게 찔러댔다.


살아있으려면 알아야 해. 피가 돌아야 해. 인선이 나를 깨웠다. 고통이 찾아왔다.


학살을 일으킨 이들과 죽은 이들과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 남아있다. 이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꿈속에서도 조차도 잊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나는 선과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길 지껄였던 아무것도 모르던 지난밤을 후회했다. 무지해서 일어난 일이다. 또 알지 못해서 일어날 일일 지도 모른다.

알아야겠다. 이 모든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눈물을 훔치며 다음 장을 넘겼다.


밤새 악몽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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