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나를 좋아한다는 당신에게
“별로 잘 생기지도 않았고, 얼굴빛은 몹시 창백하고, 다리를 절어도, 나는 네가 좋아.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널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사자 왕 형제의 모험 p.18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창비
첫 장을 펼치자마자 쏟아진 이 말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려봤다.
달희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학습지 방문 판매자였고, 달희는 학습지 교사로 일하러 온 방문교사였다.
나는 아이가 어려서 출퇴근이 자유롭고 학습지 판매 부수가 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을 안고 기본급도 없는 직장을 희망차게 다니고 있었다.
달희는 달희대로 아이를 갖기에도 직업을 갖기에도 시기를 놓친 주부였다. 회계사 남편은 자신보다 좋은 대학을 나온 달희가 집에서 놀고 있는 게 마땅치 않았다. 학습지 교사는 대학만 나오면 취업이 되었다.
그만큼 이직률도 높았다.
내가 달희를 좋아하게 된 건 달희가 집에 나를 초대한 날 부터였다. (달희가 나를 집에 초대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달희는 사자왕 요나탄의 마음이었을까? ) 달희의 집은 내가 잡지에서나 보던 세련되고 값비싸고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 찬 집이었다. 특히나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달희가 직접 그린 남편의 자화상과 부서지는 파도를 그린 손바닥 만한 바다 그림 3점이었다. 화려하진 않았는데 볼수록 정이 들었던 의자와 식탁은 가격을 알고 나는 속으로 몹시도 놀랐었다. (역시 비싼 게 좋다는 걸 알았다.) 시간이 갈 때마다 재깍하고 알아서 숫자가 바뀌는 검은색 플랩시계도 멋지고 신기하기만 했다.(이 시계를 몇 달 동안 검색하면서 잠들었다!)
달희는 핑크 마티니와 레이첼 야마가타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 모든 것들이 구질구질한 내 인생에서 신데렐라 구두를 신고 처음 간 파티처럼 새롭고 신기하고 깨끗하고 환상적이었다.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되게 너무너무 좋았다.
그리고 달희에게 줄 4B 연필을 사서 가방에 들고 다녔다. 그런데 달희는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린 이름도 멋진 윙 WING이라는 연필을 가지고 있었다.(연필에도 이름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결국 내가 산 연필은 초라해 보여서 주진 못했다.
왜 학습지 교사를 해. 너는 그림을 그려야지.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달희는 나에게 화이트윙을 한 자루 줬다. (윙은 블랙과 화이트 두 자루가 있었다. 이건 마치 반지를 나눠갖는 것 같은)
너는 글을 써봐. 나는 네 글이 좋아라고 했던가, 나는 네 글만 읽는다고 했던가.
달희는 그런 비슷한 기분 좋을 말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요나탄과는 반대로 자신이 뛰어나다는 걸 모르거나 알아도 무심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빛나는 재능을 사랑했다. 나는 절대로 약점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리를 절거나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이 나는 어려웠다. 어떻게 좋아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줌 모임에서 Y가 질리언 웨어링(예술가)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글로 써서 들고 사진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재밌게 보였다. 우리도 해볼까? 1월이니만큼 스타트란 단어도 있었고, 신나거나 들뜨거나 아이들 방학이 길다는 심정도, 자유롭고 싶다는 글도 있었다. 우리는 주로 희망을 적었다.
나는 나를 표현할 단어를 고르다 나는…. 사소하다...라고 적었다.
나는 착하진 않아도 위대한 사자왕으로 태어난 형을 둔 쭈그러진 스코르판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너무 잘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그 어떤 책임감도 희망도 없이 위대한 작가들의 글을 읽고 위대한 작가들의 작업을 따라 하고 낄낄거리고 있는 나는 참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 따뜻하고 아름답고 재미난 이야기를 쓴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오늘 나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너의 그 약함이 보잘것없음이, 너를 좋아하는 이유란다.
이 한마디에 이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모래알 같은 생명체는 모든 위대한 것들을 돕고 싶다.
나의 약함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착한 스코르판이 형 요나탄을 도와 칼 사자가 된 것처럼. 그런 위대함을 위해 나는 모래가 되어도 부서져도 좋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