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은 수녀원에서 행복했다. 하도 행복해서 그의 양심은 마침내 불안했다. 그는 날마다 코제트를 만나 보았고, 그는 부성애가 태어나 마음속에서 더욱더 커져 가는 것을 느꼈고, 마음으로 이 아이를 품고 있었고, 이 애는 내 딸이다, 아무것도 이 애를 내게서 빼앗아 가지 못한다, 그것은 무한히 그러하리라, 이 애는 날마다 즐겁게 교도를 받고 있으니까 틀림없이 수녀가 되리라, 이렇게 수녀원은 이제부터 내게나 이 애에게나 다 같이 우주다, 나는 여기서 늙어가고 이 애는 여기서 커 가리라, 이 애는 여기서 늙어가고 나는 여기서 죽어 가리라, 마지막으로, 정말 기쁜 희망으로, 어떠한 이별도 있을 리 없다. 이렇게 그는 생각했다.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하다가 그는 당황하게 되었다. 그는 자문했다. 이 모든 행복이 정녕 나의 것일까, 늙은이인 내가 빼앗고 훔치는 이 아이의 행복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건 조금도 도둑질이 아닐까? 그는 이렇게 자문했다. 이 애는 인생을 포기하기 전에 그것을 알 권리가 있다, 이 애를 모든 시련에서 구해 낸 다는 핑계 아래, 미리 그리고 말하자면 이 애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이 애에게서 모든 즐거움을 빼앗는 것은, 그녀의 무지와 고독을 이용하여 이 애에게 인위적인 성소(聖召)를 싹트게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왜곡하는 것이고, 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수녀가 된 것을 유감으로 여겨, 코제트가 그를 원망하게 되지 않을지 누가 알랴? 이런 마지막 생각은 거의 이기적이고 다른 생각들보다 덜 과감한 것이었지만, 그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수녀원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레 미제라블 4, p106 빅토르 위고, 민음사>>
장발장의 양심은 가장 행복할 때 그를 흔들었다. 장발장은 신분을 속이고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하여 시장이 되었다. 그때그와 똑닮은 좀도둑이 장발장의 이름으로 잡혔다. 이것은 착하게 산 장발장에게 내려진 신의 축복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가짜 장발장이 사형을 당하고 사라진 다면 진짜 장발장은 성공한 마들렌이라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의심했다. 과연 이 행복이 온전히 내 것인가? 남의 행복을 도둑질해서 행복해진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갔고 자유를 누렸다. 자유는 행복보다 위험하다.
인간이라면 목숨 걸고 싸워야 할 것이 있다. 사랑, 자유, 양심
나는 기독교인이었다. 40년을 교회를 다녔다. 기독교인의 지상목표는 "땅끝까지 복음 전파"이다. 그것이 신이 나를 만든 목적이다. 이 목적은 신이 부여했기 때문에 다른 목적이 이를 대신할 수 없다. 내가 작가로 성공한 다면 이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자식의 종교 또한 선택의 여지는 절대 없다. 그래서 뱃속에서부터 신앙을 가진다.(이걸 모태신앙이라고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과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 모태신앙을 가지게 된다. 자식의 이름도 평강이니 요셉이니 하는 성경적 이름을 선호한다. ) 여호와 이외의 신은 없다고 가르친다. 세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된 아이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자녀의 불신은 기독교 가정의 가장 큰 화고, 이는 기도 제목이 된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온 가족이 울부짖으며 기도한다. 지옥에 갈 영혼을 구해달라고. 자녀의 성공은 복음을 전파할 일꾼으로 키운 신의 은총이다. 종교 없는 성공은 불구덩이에 던져질 나락일 뿐이다. 쓰임 받지못할 성공은 부질없는 욕망으로 파멸에 이른다고 배운다.
가장 행복한 순간, 장발장은 수녀가 될 코제트의 인생이 그녀의 무지와 고독을 이용하여 종교를 강요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안정되고 행복하게 노후를 누릴 수 있는 노년의 행복을 박차고 다시 불안하고 형사 자베르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험난한 길로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