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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03. 2019

봄을 찾아 나서는 것 뿐이에요

비진도에서 만난 봄

변하는 계절이 몸에 닿던 2월의 어느 날. 트레킹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근처에 있는 섬을 검색했다. 선유도와 자월도, 비진도가 후보에 올랐다. 이번 여행을 함께하게 될 사람은 광주에 있는 복학생. 우리는 고민 끝에 통영에 있는 섬을 걷기로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나는 매일 정처 없이 떠도는 게 아니라, 조금 일찍 봄을 찾아 나서는 것 뿐이야.’






오후 1시 45분, 달리는 배는 비진도 선착장에 멈춘다. 느릿느릿 마을을 구경한다. 단정하게 적힌 글자와 건물을 덮은 진한 파도가 정답게 느껴지는 곳. 오르막길을 지나자 바닷길이 보인다. 본격적인 트레킹 시작.






외항마을에서 세 명의 아이를 만난다. 항이와 지연이, 치윤이. 그들은 낯선 우리를 보자마자 달려와 안기더니, 카메라에 관심을 갖는다. 작동법을 알려주는데, 한 명이 없다. 치윤이의 행방을 궁금해하던 중, 조그마한 강아지와 힘차게 뛰어오는 어린 소년이 보인다. 그는 해변에 나가 조개 몇 개를 주워주더니 이렇게 말한다. “다음에는 곤충을 키워서 줄게요. 꿀벌이요.”

삼각대 케이스 안에 바다의 조각을 넣는다. 걸을 때마다 조개와 소라가 작게 부딪친다. 별이 빛나는 순간을 귀에 담게 된다면, 이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산호길로 향한다. 지연이는 다시 페인트칠을 하고, 만능이는 낚싯대를 잡고, 치윤이는 자신의 반려견인 당돌이와 달린다. 언젠가 비진도를 다시 찾았을 때, 우리는 트레킹이 아닌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떠올리겠지.





오후 3시 15분, 비진도 산호길. 먼발치에 바다백리길이 보이고, 그 너머에는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계신다. 파란색 선을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벌써 비진도의 나무와 땅은 따뜻한 기운을 퍼뜨리고 있다.  동백 터널을 지나 미인도 전망대에 멈춰 선다. 미세먼지에 뒤덮인 섬들은 희미하지만, 마을과 바닷길은 가까이 보인다. 뒤를 돌면 아이들이 달려와 파도 소리를 낼 것만 같다. 고작 몇 시간뿐이었지만, 그들과 함께한 찰나에 봄이 피었다.






선유봉 정자. 산에 오를 때면 늘 정상을 생각하지만,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목적지가 아닌 숲길이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살아 숨 쉬는 나무와 햇빛, 그리고 우리의 걸음이 산의 기억이 된다.

하산을 시작한 건 오후 4시 10분. 우리의 마지막 배는 5시 15분. 그러니까 배를 타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였다. 두 갈래 길에서 쉽게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왔던 길로 내려가느냐, 조금 길지만 새로운 길로 돌아가느냐. 짧은 고민 끝에 후자를 택했다.




경사지고 위험한 길을 내려가던 중, 염소 떼를 만난다. 까만 염소들은 사람 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없이 도망간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햇살에 반짝이는 광활한 바다가 펼쳐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눈부신 하산길. 파릇파릇한 대나무 숲과 나무터널, 찬란한 바닷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섬을 여행한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라고.








선착장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 시작한다. 결국 달리기로 한다. “뒤에 곰이 쫓아오고 있다고 상상해봐.” 돌과 비탈길에 미끄러질 뻔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긴 내리막에 계속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 도착한 마을. 다섯 시였다. 입구를 지키고 계시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선착장에 줄을 선다. 드디어 자유다. 지는 해와 배 옆으로 생기는 물거품이 오후의 한 때를 장식한다. 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 저녁은 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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