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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08. 2019

시베리아 횡단 열차

꿈같은 버킷리스트 이루기

과일가게, 늘어진 색의 향연에 푹 빠져 낯선 도시에 매료된다. 시장을 돌며 손에 쥔 것은 겨우 바나나 한 송이와 음식을 넣을 가방 하나. 시장을 나와 자작나무가 있는 공원으로 걸었다.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같은 방 언니. 그녀의 긴 여정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포옹하고 역으로 향했다. 먼 곳에서도 서로의 안부가 무사히 닿기를 바라며.

해가 지는 시간을 등지고 소란한 마음을 진정시킨다. 아빠의 잔소리와 엄마의 걱정, 내가 마주할 사람들이나 두려움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로 한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도, 어떤 것을 놓치기에도 너무 이른 나이였으니. 어깨에 짊어진 배낭의 무게에 여러 번 주저앉을 뻔했으나, 많은 이들의 축복과 격려로 먼 여정에 오른다. 역무원에게 티켓을 보여주고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가 맞는지 재차 묻는다. 꽤 오래전에 예매했던 티켓에 적힌 9번 자리를 찾아간다.



근처에 앉은 남자들은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나를 쳐다봤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열차 에피소드가 전부 소설 속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역시 이상과 현실은 다른 걸까. 짐을 내려놓고 숨을 돌린다. 당분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집을 구할 일은 없다. 일주일이나 지낼 곳이 생겼다니!

 간이 선반에 과자 몇 개와 로션을 올려두고 옆자리에 탄 루스키 부자에게 이름을 물었다. 와스타브와 기에나. 그들은 알아듣기 힘든 언어를 말하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좋은 이웃이 생긴 것 같다.

유심은 잘 터지지 않고 내 생활 반경은 열차 한 칸이 되겠지만, 자유와 긴 사색이 나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건넨 선물이 선반 위를 가득 채웠다. “끄라씨바.” 이는 내 표현의 전부였다. 사실 아름답다는 말 외에 아는 단어가 없기도 했고. 얼마 후, 그토록 동경하던 자작나무 숲이 보였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이곳에 온 건지는 모른다. 분명한 건 이 순간 존재하는 모든 언어와 사람들은 내게 큰 동력이 된다는 것.

수많은 장면이 얇고 단단하게 쌓였다. 기에나는 내 침실의 이불을 깔아주고 바하는 베개 커버를 씌워줬다. 우리는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차를 마셨다. 언어가 통하거나 말거나 자기소개를 하는 것, 그리고 하염없이 해바라기씨를 까는 일에 벌써 적응한 것 같다.

어둠이 내린 저녁,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 젊은 날에 지구 둘레의 1/4를 횡단하는 것만큼 황홀하고 낭만적인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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