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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08. 2019

오늘이 마지막 샤워겠네요?

기차 위로 흐르는 24시간

6:30 am 와스타브가 떠났다. 옆집 이웃이 떠나는 순간, 나는 자고 있었다. 한 마디 인사도 못 한 채 그를 떠나보낸 사실에 속상했다. 잠시 스쳐간 인연이지만, 역시 이별은 늘 어려운 법.


건너편에서 제니와 기에나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열차 위로 내린 햇살에 깨어 대충 세수를 하고 51번 좌석에 앉았다. 바하가 준 빵과 체리요거트를 먹고 아침을 시작한다. 그린필드와 회화책. 이 나라 언어를 익히고 있는 내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사랑스러운 소녀의 굿모닝 키스로 아침이 시작된다. 눈을 뜨자마자 옆 침대로 달려와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는 것, 내 안부를 확인하는 것, 눈이 마주치면 손 키스를 날리는 것, 열차 한 칸을 돌아다니며 손을 잡고 춤추는 것. 옆 칸 이웃 마디나의 일과다. 그녀의 입맞춤에 사랑스러움이 피어났다. 양갈래로 머리를 묶고 통통 튀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재잘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난다. 아이들의 기상으로 소란한 아침이 시작된다. 아이들의 기차 놀이를 구경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9번 테이블 위로 사람들의 온기가 쏟아졌다. 하만이 준 사과와 이스마일의 초콜릿, 제니의 트윅스, 그린필드, 체리 잼. 매일 자신의 음식을 나누며 웃는 이웃들. 하지만 내가 건네는 것들은 대체로 다시 돌아오곤 한다. 결국 나만 먹는다.

3:00 pm 정차역에 내린다. 열차에 오른 지 24시간  만에 마시는 바깥공기. 마가진-정차역에 있는 간이매점-에 들어가 감자 수프 두 개와 생수, 셰메츠키를 사서 침대로 돌아왔다. 루스키의 대표 간식 두 개를 침대에 저장하는 걸 보니, 벌써 러시아 생활이 익숙해진 것 같다.



이제는 자리에 앉으면 습관처럼 셰메츠키를 찾는다. 해바라기씨를 먹기 시작한 지 2시간이 흘렀다. 이쯤 되니 몸 안에서 해바라기가 자라진 않을까, 하는 불필요한 걱정이 든다. 바하는 내 노트에 적힌 러시아 회화 문장들을 보더니 틀린 글자를 고쳐준다. 내가 러시아어를 그림처럼 그려서 못 알아보는 건가? 아니면 회화 책이 잘못된 걸지도. 그냥 후자라고 믿어야지.





8:20 pm 저녁을 먹고 나서 한참 후에 해가 졌다. 해 지는 광경에 소리를 질렀더니 한국에서는 일몰을 볼 수 없냐는 이스마일. 고개를 저으며 웃음으로 답한다. 할아버지, 그건 아니지만, 이 생활이 행복해서요!

머리를 감고 싶긴 해도 아직은 아늑한 열차 안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하바롭스크에서 만난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오늘이 마지막 샤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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