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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09. 2019

설국 열차

하라쇼 시베리아 횡단열차, 하라쇼 포아토

열차생활 4일째, 오늘도 바하는 자신의 음식을 다 내어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이스마일은 우즈베키스탄에 오라며 웃었고 마디나의 가족들 또한 하라쇼-‘좋다’라는 의미의 러시아어-를 연신 외쳤다. 따뜻하고 다정한 나의 이웃, 이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열차에 오른 지 4일이 흘렀다. 아침에 먹는 체리 잼과 흑빵은 짐을 줄이기 위한 몸부림이 됐고 점심에는 포아토-감자수프-, 저녁엔 라면을 먹는다. 아침을 먹고 셰메츠키를 까는데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5월의 눈, 생각지도 못한 계절의 변화에 탄성을 지른다. 어쩐지 독서가 어울리는 날이다. 예언자를 읽고 펜을 들었다.






설국 열차


열차의 떨림이 몸에 닿고
국경을 넘은 이들이 식탁 위에서 만난다
음식을 나누고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며 함께 춤춘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길을 지나고
건널 수 없는 강을 보내면
모두가 기다리던 정차역에 도착한다

며칠간 여행자들의 삶이 될 물과 감자수프가 열차 칸마다 쏟아지고 우리는 해바라기 씨를 깐다

무언의 눈빛과 온기
사색의 시간
새로운 도시와 몇 개의 계절

5월에 내린 눈에 온 땅이 설국으로 변한다
쓰이지 않은 종이 위에 뜨거운 시간을 녹인다






저녁, 배에서 쌀을 달라고 소리쳤고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배낭 깊숙한 곳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바하에게 라면 용기를 빌렸다. 뜨거운 물을 붓고 햇반을 넣는다. 10분 뒤, 설레는 마음으로 쌀의 상태를 확인한다. 이렇게 딱딱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돌덩이 같은 밥이 지어졌다. 결국 뜨거운 물을 다시 받아서 참을 인을 몇 번이나 새겼다. 결과는 성공. 참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더니, 열차에서 먹었던 모든 음식 중 단연 최고였다.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행복한 저녁을 맞았다.






옆 침대에는 공룡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식사를 준비하는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먼발치에서 타인의 삶을 관찰할 때면 세상은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러운 곳이 된다. 사랑스러운 이들의 미소를 보며 앞으로 내가 마주할 상황 속에서 기억해야 할 삶의 자세를 생각했다. ‘나를 잃지 말 것, 세상과 타협하며 가치를 정하지도 말고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할 것, 미소를 간직할 것.’ 이곳의 해는 부지런하지만 밤은 느리게 찾아온다. 그럼에도 열차 안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나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과 자연에 배운다. 살아가는 일과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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