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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09. 2019

당신의 안녕을 바라는 글

노보시비르스크, 사랑하는 이웃들을 떠나 보낸 날

5일째 아침, 바하와 기에나가 차를 마시고 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이웃들은 짐을 챙기고 있었다. 마디나는 내 품에 안겨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오늘은 그들의 종착지인 노보시비르스크에 닿는 날이라고 했다. 어느새 정든 이웃들과 작별할 날이 왔다. 하만과 마디나네 식구들, 바하와 이스마일, 기에나. 그들이 없는 열차 생활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모르는 비누와 작은 다리미를, 하만은 예쁜 컵을 건넨다. 얼마 간의 정적 후, 마디나의 울음소리가 열차에 울린다. 결국 모르도, 나도 눈물을 쏟고 만다.





노보시비르스크, 사랑하는 이웃들이 떠났다. 참기 힘든 고독과 적막이 엄습했다. 배낭 깊숙이 넣어둔 책을 꺼낸 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차창 너머 풍경은 여전히 고요하고 아름답다. 변한 건 내 마음뿐이었다. 바하가 두고 간 셰메츠키와 딸기잼이 우리의 이별을 분명하게 한다. 책장을 넘기며 울음을 삼킨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예매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 9번 침대칸,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과 그들이 베푼 호의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홀로 열차에 오른 날, 어떻게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 보겠다며 키릴 문자를 익히던 기억이 스쳤다. 하지만 열차 생활에 필요한 단어는 열 개도 안 되었던 것 같다. ‘안녕’, ‘고마워’, ‘천만에’, ‘맛있어’, ‘아름다워’, ‘좋아’, ‘잘 자’. 우리는 고운 언어를 빚으며 빛나는 시간을 살았다. 열차에서 남은 기억의 온도는 그들로부터 뜨거워졌으리라.





1:24 pm 우즈베키스탄식 식사-라면에 샤슬릭이나 햄을 넣는 것-를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나도 모르게 햄을 준비하고 있었다. 라면이 익는 동안 해바라기 씨를 까던 바흐의 모습이 떠오른다.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난 지 4시간 만에 그들이 그리워졌다. 음악과 책에 작은 위로를 얻는다.


모두가 떠난 열차 위, 문득 가족들과 식탁 위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이마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엄마는 뭘 사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빠가 뭘 좋아하더라.” 진열대 앞에서 고민하는 그녀에게 몇 개의 보기를 준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대부분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간 저녁, 책을 읽다 시선이 멈춘 곳에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3가지 이상 아는 사람은 드물다.

모두가 모인 식탁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인도에 떨어져서 평생 세 가지만 먹을 수 있다면 어떤 음식을 먹을 거야? 밥은 제공되니까 쌀 빼고.”
“글쎄, 모르겠다. 너는?”
“아빠 나 따라 할 거잖아. 비밀이야. 빨리 말해.”
“어유, 내가 널 왜 따라 하냐. 라면, 된장, 김치.”
“나는 가지볶음이랑 계란 프라이. 나머지 하나는 고민 중이야. 김치찌개랑 김치볶음밥 중에 뭘 먹을지.”
“쟤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가지볶음만 줘 봐.”

함께 밥을 먹고,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기억하는 것. 어쩌면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옴스크에 도착했다. 마리나마저 떠난 열차 위, 남은 건 짙은 적막뿐이었다. 예언자를 두 번 읽고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맛있던 감자 수프도, 요플레도 먹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그대들은 가만히 생각하지 못할 때 말을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고독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 입을 엽니다. (중략) 말이 많아지면 생각의 반은 죽게 됩니다.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긴 오후를 보내던 중, 옆집에 이사 온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을 짧게 소개한다. “비예든”. 그에게 셰메츠키를 한주먹 쥐어주는데, 또 다른 아이가 우리 곁을 어슬렁거린다. 복도를 뛰어다니다 지칠 때쯤,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호탕하게 웃는 4세 사샤. 갑자기 바쁜 저녁이 됐다.


이름 모를 어느 정차역. 사샤의 손을 잡고 선로를 건넌다. 세 번째 마가진에서 딸기 요플레와 오이를 샀다. 사샤의 미소에 우울한 오후가 잊힌다. 그는 그림을 그리거나 혼잣말을 하고, 또 가끔은 애교를 부린다. 사샤와 한참을 놀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오늘은 이만 잠자리에 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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