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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11. 2019

침대 위의 마지막 밤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린필드와 라면, 열차 안의 사람들, 모두 안녕!

7:25 am 일어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 비예든과 사샤가 떠났으니 무료한 시간이 이어진다. 독서와 글쓰기, 끼니를 챙기는 일로 지루한 시간을 달랜다. 그린필드를 마시고 딸기 요거트를 반 정도 먹었다. 햄 조금, 크로와상도 한 입. 바하와 식탁을 함께 쓸 땐 몰랐던 것들이 그리움이 된다. 음식의 정의는 입을 황홀하게 만드는 맛이 아니라 식사를 함께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불 위로 내린 햇살은 작은 움직임을 선명하게 한다. 삼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도시를 지나자 자작나무의 행렬이 이어졌다. 노트의 공백에 나무를 채워 넣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광활한 풍경도 그리고 싶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이다. 빈 공간에 채워진 나무를 보며 사색한다.

28시간이 지나면, 열차 위의 생활도 막을 내린다. 나는 침대 위에서 배웠다. 누군가를 돕는 방법, 위로하는 방법,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을. 낯선 사람들의 삶에서 온기를 느끼고 그들의 시간에 함께하며 생각했다. 가치 있는 것과 살아있는 것에 대해, 사랑하는 이의 미소와 눈부신 꿈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되리라고.






12:55 pm 햄을 넣은 라면을 먹고 비예든에게 받은 동물 비스킷을 꺼냈다. 그리고 쓴 커피 한 잔. 23시간 후면 라면에서 해방이라니, 행복하다. 여유를 즐기며 짐 정리를 한다. 위층에 널어둔 빨래를 개고 침대를 청소한다. 이쯤이면 시간이 많이 흘렀겠지, 하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12시 55분. 또 다른 도시로 접어들었나 보다. 이 열차는 하루 단위로 시간이 몇 번이나 바뀌는 마법을 부린다. 분명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왜 다시 1시인 걸까..





3:00 pm 정차역에 내려 아이스크림을 샀다. 아침에 산 치킨보다 20 루블이나 비쌌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오늘은 당 충전이 나의 버팀목이 될 테니. 침대로 돌아와 먹을 준비를 마친다. 셰메츠키를 깐 뒤 아이스크림 위에 몇 개를 뿌린다. 책 위에 올려진 셰메츠키는 48개. 아이스크림에 넣은 것까지 합치면 60개 정도 되려나.

창문 너머로 사랑스러운 장면이 보였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연인의 모습. 그들의 온기가 행복하게 전해진다. 노트에 적는다. 인생을 홀로 살아가기엔 이 세상에는 너무 낭만적인 것들이 많다고.





긴 하루였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이불을 털고 짐 정리를 했는데 여전히 한낮이었다. 라면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었지만, 무료했다. 아마 고독을 견디기 힘들었던 거겠지. 옆칸 이웃들이 그리워지자, 감사할 일이 늘어난다. 하나님께서 하루를 24시간으로 만드신 것. 만약 하루가 48시간이었다면.. 하하하.





드디어 기차에 적혀 있던 모스크바 시간에 접어들었다. 한국은 벌써 밤 10시였다. 아무래도 모스크바에서 시차 적응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기차에서 몇 번이나 변하는 시간에 몸이 적응해 버린 것 같으니.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결국 머리를 감았다. 다시 횡단 열차에 오른다면 그때는 샤워실이 있는 001번을 타겠다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이 낡은 열차가 그리워서 99번을 예매할지도 모르고. 아, 침대에서 맞는 마지막 밤.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여행 전, 홀로서기를 위해 짐을 짊어지고 나왔지만, 나는 한시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베개 커버를 씌워주는 이웃을 만나고 보드카의 힘을 빌려 춤을 췄다. 아이들과 공룡 놀이를 하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고 매일 새로운 시간을 살았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국경을 초월했던 날들. 떠난 이웃들은 어디쯤 있을까 궁금해졌다. 다른 열차에서 3일을 보낼 거라는 그들이 부러웠다. 덜컹거리는 공간은 여전했지만 혼자가 된 사람은 나뿐이었으니. 내일이 되면 우리는 각자의 목적지에 도착하겠지. 그들을 위해 작게 기도한다. 이후의 삶과 이어질 선택의 기로에서, 서로를 잊지 않기를. 잔을 들고 건배했던,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면서 삶을 나눴던 순간을, 우리가 함께했던 뜨거운 장면을.



오전 11시 13분, 9,288km 무사 횡단 성공.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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