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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13. 2019

씻을 수만 있다면 배낭을 메는 것 쯤이야

열차 생활의 막을 내리고 러시아의 마지막 도시에 닿았다

오전 11시 13분, 9,288km 무사 횡단 성공. 꿈만 같았던 열차 생활의 막을 내렸다. 가장 행복한 건,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다는 것과 씻을 수 있다는 사실. 빵과 라면에서 벗어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일주일 만에 배낭을 멨더니 고통이 배로 느껴진다. 역에서 만난 한국인 아저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어깨에 집 한 채를 메고 다니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숙소로 향했다.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도 헤매는 내가 러시아 지하철이라니, 조금 두려웠다. 역시나 예상대로 한참 헤맸다.



날이 무지 맑았다. 어디선가 ‘새 도시에 온 걸 환영해!’라고 속삭이기라도 하듯. 호스텔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왔다. 근처에 한식당이 없다는 소리에 다시 메트로의 소굴로 들어간다. 파르티잔스키역을 물어봤더니 내릴 때쯤 가르쳐주겠다는 친절한 분과 예쁜 역무원 언니. 시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즈마일로보 마켓으로 가는 길. 저 멀리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보인다. 분명 내가 검색한 건 시장인데, 왜 동화 속 풍경이 펼쳐지는 걸까? 입구에 들어서자 마트료시카의 행렬과 예쁜 그림이 보였다. 가판대 지붕 아래로 쏟아지는 빛에 행복한 멀미를 느꼈다.

점심엔 꼭 김치찌개를 먹겠다고 다짐했으나 한식당을 찾지 못한 바람에 오늘도 밀가루를 먹어야 했다. 감자를 넣은 빵 안에서 왜 치즈 맛이 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취한 채, 발길이 닿는 대로 걷는다. 여름으로 가는 계절과 시장 안의 사람들, 짙은 초록빛 공원, 길가에 전시된 그림. 시장을 구경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먼 걸음을 했더니, 엄청난 축복이 쏟아졌다.





공원 안에는 소풍을 나온 할아버지들이 계셨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자, 안으로 들어오라는 루스키 신사들. 다정한 초대와 만찬에 이끌려 자리에 앉는다. 식탁에 놓인 베리 주스와 치킨, 과일을 먹으며 대화를 시작한다. 물론 알지도 못 하는 러시아어로.

그들은 라일락 정원에서 꽃다발을 만든다. 그 속에 섞여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할아버지는 러시아 전통 과일과 피망 하나를 손에 쥐여주시고는 즐거운 여행을 빈다며 나를 축복해주신다. 열차 위에서 배운 단어를 총동원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예쁜 카메라 상점을 지나 발라라이카를 구경하는데 아코디언 소리가 들린다. 멋진 연주에 박수를 보내자 대뜸 악기를 건네는 연주자. 한 번도 다뤄보지 않은 아코디언을 들고 팔을 움직인다. 시장 한복판에서 즉흥 연주라, 의미 있다. 물론 결과는 형편없었지만. 하하하.





거리를 배회하며 외로운 순간을 만난다. 함께 식사하는 가족들을 볼 때,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연인들을 볼 때. 달랏 시장에서 동생들과 주전부리를 사 먹고 밤길을 걸었던 기억이 그리움으로 번진다. 다음 여행은 누군가와 함께이기를.

긴 하루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밤. 밀린 빨래를 내일로 미뤄둔 채 침대에 눕는다. 씻을 수 있다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할 따름. 반가워,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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