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캐롤 May 14. 2019

누군가 이뤄낸 꿈에 대하여

라흐마니노프 콘체르토, 그리고 안나 카레리나

흔들리는 열차가 아닌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아침. 다른 호스텔로 가는 동안 다짐했다. 다음 도시에선 반드시 한 숙소의 장기 체류자가 되겠다고. 20kg 가까이 되는 배낭을 메고 걷는 일은 늘 새롭다. 욱씬거리는 어깨에 용서를 빌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모스크바의 여름을 실감하면서.







길치의 감은 언제나 빗나간다. 구글맵은 숙소 근처에 다 왔다는 신호를 알리는데, 나는 도착지를 찾지 못한 채 방황했다. 초록색 대문을 보고 깨닫는다. ‘오늘도 쓸모없는 시간에 영혼을 바쳤구나.’ 숙소를 눈 앞에 둔 채 헤맸다는 걸 알았을 땐, 의문이 들기도 한다. 혹시 내가 바보는 아닐까 하는.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는 나를 멈추게 한 것은 기타가 그려진 표지판. 무작정 건물 안으로 향했다. 피아노를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반가운 마음에 연주를 해봐도 괜찮냐고 묻자, 마음껏 치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건반에 손을 적응시키고 호흡을 다듬는다. 라흐마니노프의 출생지인 러시아에서 그의 콘체르토를 연주할 기회를 얻었는데, 두려움에 주저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잃어버린 감각에 불확실한 마음이 요동쳤으나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법. 결국 떨리는 손가락을 모른체 하고 연주를 이어가기로 한다. 가끔 들려오는 이상한 화성에 흠칫 놀라면서도, 음악을 한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연주를 마치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내는 환호성이 들렸다. 직원들은 미소 지으며 박수를 보냈고, 그들의 마지막 문장은 고단했던 오늘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You are beautiful.”






숙소에서 10분쯤 걸으면 볼쇼이 극장에 도착한다. 내 몸보다 몇 배나 큰 기둥 옆에 서서 티켓을 예매할지 말지 고민한다. 근처에 붙은 현수막에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는 오늘부터 일주일간 안나 카레니나를 공연합니다- 장기 여행자에게 비행기 값만큼 비싼 티켓은 사치라고 생각되지만, 러시아에 온 이유는 오래된 음악이었다. 분명히 볼 만한 가치가 있겠지.


티켓을 들고 입장한다. 계절은 겨울. 새로운 사랑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과 음악이 흐른다. 멜로디를 노래하는 바이올린 소리 위에 플룻 소리가 또 다른 주제를 읊었다. 예쁜 선율을 노래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목소리, 오케스트라의 깊은 화성이 마음에 울림을 준다. 문득 예언자의 한 부분이 스쳤다. 어떤 이의 일은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것. 저들은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또 얼마나 이 밤을 손꼽아 기다렸을까. 무대 위에서 흐르는 시간에 도전을 얻기도 하고, 작은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들의 노력을 헤아리며 박수를 보낸다.






어둑해진 저녁, 마트에 들른다. 바나나와 요플레, 계란, 토마토소스, 쌀을 사서 집으로 향하는 길, 내일 아침에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터진다. 불 켜진 볼쇼이 극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벤치에 앉는다. 분수대 옆으로 퍼지는 빛의 향연. 그 너머에는 사랑을 속삭이고 낭만을 노래하는 이들이 있다. 밤이 깊어가는 동안 잔잔한 고요를 누린다. 집을 나온 지 2주가 흘렀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씻을 수만 있다면 배낭을 메는 것 쯤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