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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14. 2019

정원에서 보낸 한낮

“나는 내일 독일로 떠나, 엘릭스. 만나서 반가웠어.”

멀리 있는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화면 속 여름을 보며 수많은 물음을 던졌고, 나는 말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나중에는 꼭 함께 여행하자고. 그리고 마음으로 전했다. 늘 사랑한다고.








같은 방을 쓰는 루스키들이 밤새 소음을 내도 다이닝룸이 넓은 호스텔은 미워할 수 없다. 소파에 누워 글을 쓰다 보면 밤의 분노는 자연스레 잊히기 때문. 어느 정도 배고픔이 느껴지면 주방으로 향한다. 뜨거운 차를 준비한 뒤, 갓 지은 쌀밥과 계란 프라이 세 개를 접시에 담는다. 그 위에 토마토소스를 가득 뿌리면 조촐한 아침 식탁 완성. 막 젓가락을 들 때쯤, 옆 방을 쓰는 엘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 음식이 궁금하다는 그에게 음식을 덜어주고 아침을 함께한다. 엘릭스는 묻는다. 한국 남자와 러시아 남자가 어떻게 다른지, 북한과 한국의 관계는 어떤지, 이 나라가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서툰 영어로 천천히 답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나는 내일 독일로 떠나. 엘릭스, 만나서 반가웠어.” 그는 김을 먹을 때마다 나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며 남은 여행을 응원했다.






러시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오후, 구글맵을 의지해 걷다 길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멈춘 곳의 표지판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오늘의 목적지였던 알렉산드롭스키 정원. 가끔 길을 잃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이렇게 멋진 정원이 집 근처에 있었다니,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매일 잔디밭에 누워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책을 읽을 걸. 하지만 이내 감사하기로 한다. 이제라도 온 게 어디야!






산책로를 걷다 민들레 화관을 쓴 아이들과 마주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주던 토끼풀 꽃다발이 떠오른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무 그늘 아래 앉아 그들만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라일락 향이 짙게 퍼지는 공원 어딘가, 계획했던 일은 까맣게 잊고 풀밭에 앉아 여유를 즐긴다. 비록 굼 백화점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했고 아르바트의 버스킹도 보지 못했으며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근처도 가지 못했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작은 희망사항을 이루는 것보다 하루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일이 더 깊은 잔상을 남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원에 있는 자연이 희미하게 속삭였다. 행복은 나의 일부를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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