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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y 25. 2019

어느 초록빛 여름날

베를린의 초록 정원과 밤 열한 시의 탱고

써머 타임이 시작된 이 나라에서 서두를 이유는 없다. 그 핑계로 11시가 넘어서야 몸을 일으킨 우리. 원래 가려던 이태리 식당에 리조또가 없어서 메뉴를 변경한다. 점심은 인도 커리. 강을 건너 인디아 레스토랑에 도착한다. 배가 고팠던 오빠와 나는 이성을 잃은 채 음식을 주문했고, 얼마 후 지나치게 많은 그릇이 테이블에 올려졌다. 커리와 난, 감자튀김, 그리고 처음 보는 소스들. 날리는 쌀이 아쉽다고 투덜거리면서 배가 터질 때까지 먹었다.






강가를 따라 걷다 만난 플리마켓. 흑백 엽서와 오래된 종이 냄새에 6유로를 써버렸다. 마음 같아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쓸 엽서를 잔뜩 사고 싶었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게 지나친 물욕은 사치일 뿐. 엽서 세 장에 만족하고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몽비쥬 공원, 초록이 짙은 곳에 다정한 시간이 펼쳐졌다. 라켓을 들었지만 공을 한 번도 치지 못하는 아이,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비키니를 입고 돗자리 위에 누워있는 여자들, 바비큐 파티를 즐기는 이들. 오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 뭐 바다야?”

해를 사랑하는 독일인과 그늘을 사랑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공원에서 구별된다. 우리의 선택은 나무 아래 피크닉. 하케셔막트에서 산 초콜릿과 탄산음료에 취해 여유로운 오후를 누린다.






허기가 느껴질 때쯤, 공원 근처에 있는 유명한 케밥 가게로 향했다. 그를 만난 이후, 나는 먹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샐러드 피자와 케밥을 시키고 자리에 앉는다. “와, 독일어로 음식도 주문하고. 유학생 답네.” 오빠는 내 칭찬에 머쓱해하더니, 케밥만 먹고살아서 그렇다고 답한다. 얼마 후, 낯익은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내가 혼자 베를린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가이드가 되어줬던 인도 할아버지였다. 이 넓은 베를린에서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우리는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할아버지는 베를린을 떠나기 전에 또 만나자며 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네셨다.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인사했다. “Sehr Gut. Tschüss!” -좋아요, 안녕!-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오페라 극장으로 향했다. 독일에서 보는 첫 연주.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홀 안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정장을 입은 공연 관계자들과 화려하게 차려입은 관객들이 우아하게 걸어 다녔다. 배낭여행자인 내게 예쁜 구두나 눈부신 드레스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함부르크에서 유학 중이던 그도 마찬가지였고. 우리는 입을 반만 열고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집으로 돌아갈까? 탱고 음악회가 관객과 함께 춤을 추는 거 아니야?”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었지만, 누가 한국어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이며 맨 뒷 줄에 섰다.


11시가 되고 입장을 시작했다. 오빠와 나는 얼마든지 문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얼마 후, 연주자들이 무대로 나왔다. 그들은 연주를 시작했고 객석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음악을 들으며 안도했다. 애초에 춤출 걱정 따윈 할 필요도 없었던 것. 아름다운 시간 속에서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음악을 만났다. 피아졸라의 음악과 베를린의 여름이 여러 빛깔로 반짝이는 밤, 눈을 감고 짧게 기도했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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