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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l 18. 2019

오빠의 정원과 파스타

살아 움직이는 빛과 강렬한 힘에 이끌려 작은 용기를 얻는다.

오빠는 얼마 전에 집을 옮겼다. 그는 차근차근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더니 금세 이사를 마쳤다. 아마도 한동안은 자신의 공간을 가꾸는 데 전력을 다했던 것 같다. 가끔 페이스톡을 걸어 방을 구경시켜주거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행복을 전하곤 했으니. 하지만 그의 휴무날엔 꼭 무슨 일이 있었다. 여행 날짜와 겹친다거나 레슨이 있거나. 그렇게 미뤄진 약속이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났다.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중, 선화동 주민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즉흥적으로 약속을 잡는다. 오빠의 휴무는 내일이었고, 나도 별다른 일정이 없었던 것. 그러니까 내일은 집들이!

느지막이 일어나 짐을 챙긴다. 머리를 대충 묶고 눈에 띄는 갈색 원피스를 입는다. 책상 위에 놓인 책 다섯 권을 도서관에 반납한 후, 약속 장소로 향한다. 선화동으로 가는 버스 안, 오빠는 묻는다. 무슨 파스타가 먹고 싶냐고. 아무 거나 상관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애호박을 넣겠다고 한다. “아니, 좀 무난한 걸로 하면 안 돼?” 음식을 정하는 건 요리사 마음이라며 동생의 의견은 가볍게 무시하는 김 셰프. 그럴 거면 물어보질 말던가. 하하하.




조금 다른 집들이 

노크를 하자마자 문이 열린다. 그런 뒤에는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던 설희가 요란하게 등장한다. 좀 놀라긴 했지만, 그녀의 애교 섞인 웃음에 모든 게 용서된다. 반갑게 인사하고 새집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창가의 작은 정원. 바싹 마른 로즈마리를 제외한 많은 식물들이 생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반짝이는 것들을 시샘하자, 오빠는 말한다. 타임을 파는 가게를 찾지 못해 씨앗을 심어 키웠다는 것, 식물들에게 햇빛을 보여주기 위해 집주인께 옥상을 빌려달라고 전화를 걸었다는 것, 베란다가 있는 꼭대기 층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 허브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화장실 문에 걸린 행거 안의 수건과 잘 정리된 옷을 보며 감탄사를 연신 내뱉는다. 세탁기 옆 창가에는 작은 다육이가 있고, 그보다 더 작은 식물이 냉동실에 자석으로 붙어 있다. 곳곳에 놓여 있는 생명을 보고 은근한 부러움을 내비친다. 다음에는 꼭 해가 잘 드는 집을 얻어서 아름다운 정원을 가꿔야지.





오빠는 팬에 기름을 두르고 애호박과 양파, 베이컨을 넣는다. 그 위에 꽤 많은 재료가 더해지면서 마법이 시작된다. 진상 손님이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자 요리사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맛있는 음식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단다.” 파스타는 5분이면 충분하다고 하더니. 덕분에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고 식탁에 앉는다. 젓가락을 들자 크림과 토마토를 외쳤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음식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 애호박이 만든 파스타가 이렇게 맛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식사를 마친 후, 짧은 여름휴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성숙해져 있었고, 우리의 여름은 달고 느슨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집에서 나와 동네를 걷는다. 내가 사는 곳과 다른 점은, 골목이 있고 오래된 주택이 있다는 것. 누군가의 손길이 깃든 마당의 풍경, 낡은 것에서 오는 편안함, 가지런한 거리와 공원에 마음을 빼앗긴다. 꽤 선선한 날씨 덕분에 여유로운 산책이 계속된다. 커피와 맥주를 파는 카페에 반해 가을 피크닉을 약속하고 대화를 이어간다. 오빠는 더 깊이 있는 요리를 갈망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성이 담긴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것. 그 목소리에 진실된 마음이 반짝였다.


살아 움직이는 빛과 강렬한 힘에 이끌려 작은 용기를 얻는다. 다시 세상에 나가 꿈을 꾸고 많은 것들을 껴안아야지. 초록 들판과 눈부신 삶을, 그리고 소중한 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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