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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Feb 23. 2020

모두의 회복을 바라며

병실에서 쓰는 일기


병실 일기
택시를 탔지만 기차를 놓쳤다. 집에서 챙겨  반찬은 쇼핑백으로 쏟아져  신발을 갈색빛으로 물들였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모른 체하고 병실 사람들을 생각한다. 할머니와 엄마의 갈비뼈가 회복되었는지,  냉장고 안의 과일이 썩진 않았는지. 기차에서 내리면 삶의 시계는 다시 느릿느릿 움직일 것이다. 비슷한 하루가 반복될지도 모른다. 손빨래를 하거나 낮잠을 자고, 과일을 먹고 드라마를 보고.


사랑하는 이들의 흉터로 빨갛게 물든 팔 월. 701호에 머문 지 어느덧 열흘이 넘었다. 병실에 새로 들어온 환자와 인사한다. 금빛이 도는 긴 머리칼을 보고 국적을 묻는다. 노보시비르스크, 눈물과 잠옷 차림의 작별인사를 남겼던 곳. 여기서 다시 러시아를 떠올리게 될 줄이야. 그녀의 언어는 지난봄의 기억을 선연하게 만든다. 우리는 서로의 여정을 상상하며 뜨거운 비행을 시작한다. 리자와 루스키의 바다, 열차 안에서 먹던 감자 수프와 그린 필드. 두 사람의 작은 조각은 차곡차곡 쌓여 밤의 일부가 된다. 아름다운 순간에 닿는 순간 새로운 힘을 얻는다. 아마도 그건 엄마와 당신의 회복이 머지않았다는 믿음이겠지.



금요일 아침. 허리를 삐끗한 딸은 환자복을 입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엑스레이를 찍는다. 다행히 별 이상은 없지만, 아침저녁으로 먹어야 할 약이 생긴다. 엄마와 약국 산책을 다녀와 낮잠에 든다. 깨어난 후에는 716호 노부부가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할머니의 해맑은 웃음과 할아버지의 수다가 그리워지는 순간, 흘러가는 시간은 더없이 소중해진다. 눈을 반만 뜬 채로 숟가락을 든다. 느린 식사를 마치고 숲으로 향한다. 오늘 사귄 이웃은 건너편 병실에 계시는 아저씨 부대. 그들은 내 허리를 걱정하며 자리를 내어준다. 금세 아저씨들과 친해져 웃음꽃을 피운다.

토요일 새벽녘 창가, 산과 산 사이에 구름이 있다. 그 풍경에 취해 아침을 보내고 호숫가로 나간다. 처서가 지나자마자 가을에 닿을 줄이야. 엄마와 긴 산책을 마치고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온다. 다른 병실 이웃이 놀러 와서 커피를 건넨다.  병원이 열차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다른 이는 사람들 속에 섞이고. 그러다 보면 작은 마을이 생긴다. 사람들은 빈틈을 사랑으로 허물고 다리를 만든다. 우리는  다리 위에서 함께 춤을 추거나 침묵한다.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가며 마음을 덮는다. 감정선이 평지를 걸을 때면 감사가 피어난다. 아름다운 하루도, 궂은 하루도 결국은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라는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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