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을 살아내는 일

갑자기 추워진 날, 따뜻한 나라를 떠올리며

by 앨리스킴


하룻밤 사이에

어제의 가을이 변심했다.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온 첫추위에

나무도, 사람도 다들 놀란 눈치다.


저녁 산책길,

찬 바람에 귓볼이 벌써부터 시렸다.

집을 나설 땐 패딩 점퍼가 아직 과한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첫추위에 떨고 나면 겨울 내내 힘들어진다는 걸 안다.

그래서 눈치 보지 않고 두껍게 꺼내 입었다.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나는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가 참 자랑스러웠다.


봄엔 산과 들에 꽃이 피고,

여름엔 짙은 초록 숲,

가을엔 아기 볼처럼 발그레한 단풍,

겨울엔 하얀 천사 같은 눈이 내렸다.


그건 우리나라만 누리는 특별한 혜택인 줄 알았다.

세상 어디나 같은 위도에선

비슷한 계절이 찾아온다는 걸 배우기 전까진 말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계절이 바뀌는 게 정말 좋은 걸까?’


어릴 땐 계절 변화가 신비로웠는데,

이제는 그 변화를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일이 되었다.


특히 오늘처럼 갑자기 추워진 날이면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긴장부터 한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며

마음까지 따라 오그라든다.


사계절의 자부심이 이젠 낭만이 아니라

‘몸의 스트레스’로 느껴질 때가 있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몸이 움츠러드는 내 모습을 떠올리니,

요즘은 따뜻한 나라에서 지내는 딸아이의 말이

괜히 부럽게 들렸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내는 게 참 여유롭고 편해.”


그곳은 언제나 여름날씨라,

계절의 변화가 거의 없다.

하루의 온도차도 크지 않아

옷을 바꾸거나 날씨를 걱정할 일도 드물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표정도, 삶의 속도도

어딘가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인다고 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남보다 앞서지 않아도 괜찮은 분위기.


그 단순하고 느릿한 리듬 속에서

딸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했다.



같은 지구 위에서도

계절이 다르면 사람의 마음결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딸아이의 여유로운 계절과 달리,

나는 계절의 무게를 먼저 느낀다


새싹이 움트는 봄의 설렘보다

겨울의 추위가 먼저 떠오른다.


첫눈 소식에 들떴던 마음도

이젠 ‘많이 춥겠지’ 하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계절이 바뀌는 게 예전처럼 반갑지 않다.


사람들은 계절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지만,

붉게 물든 저 단풍도 어쩌면,

겨울을 준비하느라 몸살을 앓는 나무들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사계절의 나라는 분명 풍요롭다.

계절마다 다른 색을 보고, 냄새를 맡고,

마음을 새롭게 단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끊임없이 적응해야 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바꾸고,

생활 리듬을 조절하며,

몸과 마음을 다시 다잡아야 한다.


열대의 한 계절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변화 대신

‘한결같음’ 속에서 여유를 얻는지도 모른다.


나도 나이가 들수록,

한결같은 평온을 더 그리워하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따뜻한 곳에서

조용히, 느긋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계절의 바퀴 위에 서서 인생의 순환을 배운다.


모든 변화가 결국,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려는 자연의 가르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처럼 갑자기 추워진 공기 속에서는

그저 따뜻한 패딩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낀다.


사계절을 살아낸다는 건

대단한 교훈을 얻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작은 위안 속에 서 있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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