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소중함
어제까지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했던 집 안이,
철 지난겨울 바닷가처럼 썰렁하다.
사람이 떠난 자리의 허전함은 알고도 매번 깊게 다가온다.
살다 보면 누구나 떠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남겨진 사람이 되기도 한다.
떠나는 쪽은 다시 자기 일상을 찾아 분주하니
그 공백을 실감하지 못한다.
쓸쓸함은 늘,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2주 동안 아침마다
웃음꽃이 피던 거실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마치 텅 빈 갯벌에 홀로 남겨진 기러기처럼 마음이 허전하다.
이 쓸쓸함이 바로 언니들의 빈자리인 듯하다.
언니가 끓여놓고 간 호박죽을 데우려고
오래 쓰던 냄비를 꺼냈다.
끓어 넘친 국물이 눌어붙어 얼룩이 된 그 냄비는
아무리 닦아도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냥 쓰다 버리면 되겠지’ 싶어 대충 넘겨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꺼내 보니,
‘이게 우리 집 냄비가 맞아’싶을 만큼
반질반질 윤이 나 있었다.
언니가 얼마나 정성껏 닦아놓았던지.
그 손길이 한 번 닿고 나니
묵은 때가 싹 벗겨져 새것처럼 살아났다.
역시나 뭐든 단정하게 해내고,
낡은 것도 손만 대면 되살려내는 건 우리 언니만의 능력이다.
나는 7남매 중 막내다.
언니와 오빠들이 든든하게 지켜준 덕에
어린 시절 시골살이를 했어도
내 손을 보탤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몸을 쓰는 일에서는 손끝이 야무진 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언니들 앞에서는
내가 놓친 부분들이 금세 드러난다.
언니들이 오면 꼭 장학관 점검이라도 나온 것처럼
우리 집은 순식간에 대청소 모드로 들어간다.
나도 나름대로 깔끔하게 지낸다고 생각하는데,
언니들 눈에는 어딘가 늘 부족해 보였던 모양이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뒤로도
나는 오히려 엄마 이상으로 언니들의 챙김을 받고 있다.
고춧가루, 깨 같은 양념부터 김치와 밑반찬까지 빠짐없이 보내준다.
주부 경력 30년이 넘었는데도
나는 아직 김장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언니들에게 기대며 살았고,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네 자매는 참 사이가 좋다.
사는 곳은 서로 달라도, 계절마다 한 집에 모여
며칠씩 함께 지내곤 한다.
먹고 떠들고 웃다가도 모자라
수학여행 온 여학생들처럼 밤늦도록 조잘댄다.
이야기의 중심은 늘 아버지다.
저 위에서 아버지는 분명 이렇게 말하고 계시겠지.
“누가 내 욕을 하나? 왼쪽 귀가 가렵네.”
어릴 적 아버지가 남긴 서운한 기억들마저
자매끼리 모이면 웃음이 되고, 결국 추억이 된다.
딸이라서 겪어야 했던 그 서운함들이
언젠가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남을 거라는 걸
아버지는 과연 아셨을까.
2주 전, 서울살이를 시작한 조카 이사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세 자매가 우리 집에 모였다.
(큰언니는 사정이 있어 아쉽게 함께하지 못했다.)
언니 둘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가 보니,
주차장 한쪽이 아예 ‘산’처럼 쌓여 있었다.
김장김치, 밑반찬, 마른 나물, 생선, 사과, 감, 누른 호박까지…
박스며 보자기며 들고 온 것들이 엘리베이터한테 미안할 지경이었다.
냉장고는 이미 포화 상태라 넣었다 뺐다 반복하고,
결국 일부는 베란다행.
그나마 날씨가 추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니들이 오면 나는 자동으로 부엌에서 밀려난다.
여기서는 ‘나도 요리 좀 한다’고 뻐기지만
어린 시절부터 일꾼들 식사를 챙겼던 언니들 앞에선
나는 여전히 병아리다.
한동안 언니들 밥을 얻어먹고 지내다 보니
몸무게가 2kg은 늘어 있었다.
나는 솔직히 좋았다. 든든하고, 맛있고, 무엇보다 언니표 반찬이니까.
하지만 언니들은 나와는 체질이 달라
“모이면 살만 찐다니까…” 하며 은근히 투덜거렸다.
이제 육십 중반을 넘어선 언니들을 보니,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 일정을 시작했던 예전과 달리
체력이 떨어진 게 눈에 보여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인지,
같이 보내는 이 시간들이 유난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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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2주 동안 나는 평소의 리듬을 잠시 내려놓았다.
글쓰기 근육을 길러야 한다며 브런치에서
점잖은 ‘경고장’까지 받았지만,
글쓰기, 읽기, 빌려온 책, 약속까지 모두 미뤄 두었다.
언니들과 함께하는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로 건강해야 하고, 시간도 맞아야 가능한 일이니까.
덕분에 곳곳으로 여행도 다니고,
예쁜 카페도 찾아다니며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 앨범을 만들었다.
떠나고 나서야
곁에 있을 때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지금 이 고요함이,
그 시간들이 얼마나 환하고 빛났는지를 증명한다.
언니들이 남긴 사랑의 흔적 덕분에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든든하고,
따뜻한 위로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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