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아닌 아버지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던 친구들이 가끔 부러웠었다.
우리 아버지가 아빠? 왠지 어색하다. 처음 말을 배울 때부터 우리에겐 아빠 말고 아버지였다.
생각해보면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내 주변에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애들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시대상황과 그 지역의 정서가 바탕이 되었으므로 그때 그 시절 우리 고향에선 누구에게나 당연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였다.
중학교 때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적잖이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응석을 부리고 장난도 치고 함께 노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꿈도 못 꿀 일을 해내고 있는 그 친구가 내심 얼마나 부러웠던지.
1928년생인 아버지는 도시로 이사 오기 전 40 평생을 농촌에서 생활하셨다.
관습이나 사고방식이 유교사상이 깃든 조선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던 환경에서 살아오셨기에,
아버지의 생활습관은 21세기의 편리함보다는 오히려 조선시대의 풍습을 더 익숙하고 편하다고 느끼시는지도 모르겠다. 여태 까지 그 흔한 휴대폰도 마다 하시는 걸 보면 말이다.
양반의 체통을 고수하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또한 권위를 지키는 일이라고 여기신 듯
예의범절을 강조하며 자식 교육에 엄격하셨고, 생활의 전반적인 면에서 고지식 그 자체였다.
제사 지내는 시간도 자정을 안 지키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정시를 고집하셨고,
밥상은 따로 차려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다 밥상머리에서 떠들기라도 하면 호통을 치셨다.
‘쩝쩝 소리 내지 마라, 수저를 한꺼번에 들지 마라, 밥알을 그릇에 붙여 놓으면 안 된다. 국물을 남기면 안 된다 등등….’
밥 한번 먹는 일에 뭐 그리 안 되는 게 많던지.
남녀 구별은 철저해서 지금까지도 딸들은 출가외인 취급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손주들도 ‘외’ 자가 붙으면
세뱃돈 액수 차이는 물론, 결혼식 미참석이 당연할 정도이니.. 요즘 세상의 시대적 변화 같은 건 아버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요즘도 우리는 아버지 뵈러 가면 먼저 절부터 해야 한다.
동갑내기 남편은 운 좋게 아버지 말고 아빠라고 부르며 자라온 가정환경 덕분에 처음 처갓집의 풍습이
꽤나 어색했다고 실토한다. 하지만 이제는 남편도, 애들도 익숙해진 듯 당연하게 절부터 올린다.
‘옛말에 귀한 자식 일 수록 매로 다스리고, 엄하게 키운 자식이 효자 된다’는 말.
귀에 따갑도록 들었던 엄마의 훈계대로 우리 칠 남매는 하나같이 효자 소리를 듣긴 한다.
어린 시절 주위에서 ‘누구네 집 자식들은 참 바르더라.’는 소리가 싫지 않아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렸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 자식 간의 거리감은 어쩌랴.
아버지가 어려워 간혹 엄마가 안 계신 집에 아버지를 뵈러 갈 때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던 걸 보면,
자식들에게 엄격했던 교육방식이 결코 A+ 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나, 아버지를 어렵고 무서운 이미지로 우리에게 심어준 건
엄마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말 안 듣는 자식들 길들이기 위해 잠깐 겁주는 방편으로 "너희 아버지 아실라"를 주입시켰던 건, 자식들의 잘못은 온전히 엄마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던 엄마 본인의 기우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무뚝뚝하고 엄하긴 하셨어도 회초리를 들거나 정말 무섭게 체벌을 하신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말이다.
지관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우리 고향에서는 제법 명망이 높았다.
운동회 날이면 교단 옆에 마련된 천막 아래 귀빈석 자리를 차지할 만큼 나름 유명인사였다.
저학년이었던 운동회 날 < 함께 달리기>라는 종목이 있었는데, 조금 달리다가 땅에 흩어져 있는 쪽지를 줍고
쪽지에 적힌 대로 수행하면 되는 게임이었다.
운 좋게도 나는 ‘아버지와 손잡고 달리기’를 주웠고, 귀빈석에 계셨던 아버지를 빨리 소환할 수 있었던 덕분에
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에게 그런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기도 했다
내게 아버지는 항상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한 분이었다.
동네의 크고 작은 일에 해결사 노릇을 도맡아 하시며, 불의를 보고는 모른 척하지 않는 호랑이 선생님을
자처하셨기에, 그 당당함이 자식들에게나 동네 사람들에겐 든든한 큰 산이었다.
“그냥 저희 집으로 가세요. 혼자 못 지내십니다.”
“느그 어매 금방 올 낀데…”
94세 아버지는 119 구급차에 실려간 엄마가 얼마 안 있어 회복되어 오실 거라 굳게 믿고 계신 듯하다.
‘사실은 엄마가 아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많이 아프세요...’ 어떻게 말씀 드릴수가 있으랴.
엄마를 병원에 모셔놓고 아버지 거취 문제가 난제였다.
고집불통이라 한번 안된다고 하시면 어느 누구도 꺾을 수가 없다는 걸 모두 다 너무 잘 알기에 형제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심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구순이 지난 아버지와 엄마는 자식들이 여럿인데도 ‘살던 곳이 편하다’ 하시며 따로 사시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아 여태까지 자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두셨다.
“남들이 욕하겠어요. 칠 남매나 되는데도 연로하신 부모님 따로 사시게 한다고.”
“어쩌겠냐. 저렇게 역정까지 내시는데 내가 자주 가보는 수밖에."
칠순이 다 된 큰오빠는 맏이라는 이유로 거의 매일이다시피 부모님 집을 들락날락하며 일선에서 일할 때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냈었다.
그러던 차에 우려했던 일이 발생됐고, 이제는 혼자가 되어버린 노인네를 도저히 사시던 집에 계시게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긴 설득 끝에 극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엄마가 퇴원해 오시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아버지를 집으로
다시 모셔 드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아버지는 겨우 승낙을 하셨고, 아버지 집에서 제일 가깝다는 이유로 일단 셋째 아들 집에 가시기로 했다.
그랬었는데,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집으로 가시겠다고 막무가내 셨단다.
아들 집도 당신 집만큼 편치 않으셨던지, 아니면 엄마가 금방 오실 거라 집을 비워두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셨던지 암튼 한바탕 큰소리가 났었단다.
안 봐도 알 것 같아서 일단은 아버지 하자시는대로 집으로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큰오빠는 또 두 집을 오가며 세상에서 제일 바쁜 칠순이 되셨고, 동생들이 아무리 도와준다 해도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보니, 결국 전적인 건 고스란히 큰아들 몫이 되었다.
맏이로 태어난 게 뭐 그리 큰 벼슬이나 된다고...
더군다나 큰오빠 젊은 시절에 다쳤던 발목이 다시 말썽을 부려 다리를 절룩거리며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다.
멀리 있다는 이유로 아무 도움도 못 드리는 죄송함에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궁여지책으로 평일엔 요양보호사가 집안일을 도와주기로 하고 주말엔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아버지를
모시고 야외로 나가 당신이 드시고 싶은 음식을 사드리기로 했단다.
가끔은 딸들도 여건이 되는 대로 참여하기로 하고.
한번 꽂히면 질릴 때까지 한 가지만 드시는 아버지의 식성은 장어구이에서 활어회로, 요즘은 향어회란다.
“이번에도 또야?”
“그래도 그 연세에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다는 게 다행이지 뭐.”
우스개 소리로 막내 오빠는 장어구이 집에 자주 가다 보니 장어 소리만 나와도 헛구역질이 날 정도라고 한다.
그렇게 내일 내일 하며 지내다가 어느덧 일 년 가까이 이런 생활이 지속되었는데,
며칠 전 그런 아버지께서 엄마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가시겠단다.
엄마를 종합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모실 때, 어차피 혼자 계실 바에야 엄마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시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해서 아버지의 의중을 살짝 떠보니 요양병원은 절대 안 가시겠다고 하셨단다.
아버지 생각에 요양병원은 마지막에 가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 같았다.
“느그 어매는… 영 안 되것드라. 쯧쯧.” 하시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얼마 전 가림막 너머에 당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를 보시고 온 뒤로 머지않아 꼭 돌아올 거라는,
자기 최면으로 걸어두었던 희망을 이제는 거두신 모양이다.
학자인 Elizabeth Kubler Ross는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70 평생을 함께 한 배우자의 불행을 어느 누가 쉽게 받아 들일수 있을까.
아버지께도 이런 시간이 필요했었나 보다. 일 년 이란 시간이-.
이 다섯 단계 설을 입증이라도 하듯 아버지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하신 모양이다.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시간 속에 함께 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부부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해 드리기로 하고 이것저것 수속을 마치고, 오늘 드디어 병원으로, 엄마 곁으로 가시는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괜히 마음이 허전하고 울적해진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으로 보나 여러 면에서 보더라도 아버지는 비교적 건강하게
장수하시는 복 많은 노인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착잡한 이유는 뭘까?
머지않은 미래에 가까운 사람들과의 이별을 하나씩 하나씩 경험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음을 나 스스로 인정하고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기는 자기 연민 같은 걸까? 길가다 나이 많은 노인을 볼 때마다 괜히 마음이 짠 해지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다 같은 마음일 언니들이 차례로 전화가 걸려 왔다.
“연세 때문에 혹시 몰라 치매 검사도 하신단다. 치매 진단이 나오면 병원비 할인이 많이 된다던데...”
말끝을 흐리는 뒤에는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 먼저 말했다.
“그러게. 병원비 부담도 덜 겠네.”
작년에 요양보호사 요청할 때도 치매 진단을 받으면 지원을 받는다기에 검사를 하셨단다.
“어르신. 오늘이 며칠이에요? 지금이 몇 년도예요? 성함은? 나이는? 학교는?…..”
간호사의 기본적인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잘하시다가, 1+2는? 무슨 색깔?…
계속되는 뻔한 질문에 참다못한 아버지는 급기야,
“내가 등신인 줄 아나!” 버럭 화를 내는 통에 모시고 갔던 오빠가 난처해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연한 노파심이 든다.
이럴 때 눈치껏 융통성을 발휘하시면 좋을 텐데. 우리 아버지께는 절대 안 통할 말이다.
오빠들도, 언니들도 마음이 안 좋은 건 마찬가지 일 것이다.
고려장 치르는 불효자가 된 기분이라며 울먹거렸다.
우리 모두.
“이번에 들어가시면 코로나로 당분간 외출도, 면회도 금지라는데 괜찮으시겠냐.” 말씀드려도 상관없다 하신다. 그토록 좋아하시던 향어회도 못 드실 텐데… 마음이 아프다.
칠 남매 단톡에 큰오빠의 공지가 떴다.
저녁으로 국수를 먹다가 목이 콱 멘다.
더운 날 마음고생. 몸고생 하셨을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특히나,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노인네의 축 처진 어깨가 자꾸 눈에 밟힌다.
우리는 알고 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이번에 들어가시면, 어쩌면…
코로나가 언제쯤이면 주춤할지, 그때까지 두 분 다 기다려 주실지, 엄마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은 아버지가
오히려 더 못 버티시면 어쩌나,
어쩌면….이라는 우려를 각자는 했을 거라는 걸.
이번 일을 겪으며 혼자 남겨진 노인에게 선택지가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모두의 과제일 연로와 노쇠, 그리고 그때의 거처.
이 문제에 해답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불효를 하는 불편한 마음 없이 모실 수 있는 곳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기꺼이 말고 흔쾌히 갈 수 있는 곳이 있었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아빠 말고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도 못했다.
다음에 만나 뵈면 두 손 잡고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 아니 아빠! 사랑합니다!”
그런 날이 꼭 오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