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하루를 엽니다.

-꽃향기 따라 걷는 부부의 아침 산책-

by 앨리스킴


우리는 오늘도, 숲으로 향한다.


하루 사이, 아침 공기가 달라졌다.

차가울 줄 알았던 바람이, 미적지근한 세수 물처럼 어정쩡한 온기로 얼굴을 스친다.

어제 까지만 해도 든든했던 외투가 오늘은 괜히 거추장스럽다.


늘 그렇듯, 아침이 되면 남편과 나는 숲으로 향한다.

이 숲은 매일같이 우리를 변함없이 반겨주는 고마운 친구 같다.

도심 가까이에 이런 숲이 있다는 건 큰 선물이고 축복이다




숲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가 코를 훅 찌르고 들어온다.

“어, 이거 무슨 냄새지? 향이 좋은 비누 냄새 같은데.. “

남편은 코끝을 씰룩이며 향기의 정체를 추적하듯 두리번거린다.


나도 따라 주변을 탐색했다.

“아카시 향인가?… 찔레꽃 향 같기도 하고…”


매일 걷던 산책길인데, 아카시꽃이 오늘에서야 눈에 들어온다.

막 피기 시작한 꽃송이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가느다란 윈드차임(Wind Chime) 같다.

바람이 흔들면 ‘때그랑~’ 맑은 소리가 날 것만 같은데… 대신 달콤한 향기가 숲 속 가득 퍼진다.

<아카시 꽃>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샛노랗게 피어 있던 황매화는 어느새 시들어 힘을 잃고,

그 자리에 하얗고 송골송골한 찔레꽃이 살포시 피어올랐다.

작은 꽃머리 곁에선 꽃벌들의 조용한 파티가 한창이다.

초대받지 않았지만 우리도 살며시 다가가 보니, 진한 향이 콧속 깊이 찌르르 스며든다.

그 자리에 잠시 멈춰 , 향기에 취해본다.


찔레꽃 앞에서, 마음에 떠오른 소감을 한 줄씩 건네봤다

꾸밈없는 예쁨, 그래서 더 끌리는.”

수풀 속 비밀병기.”

화장 안 했는데 이렇게 예쁠 일?”

고운 척 안 해도 고운 꽃.”

소박해서 더 눈길이 가는, 조용해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꽃이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 ~ ~)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동시에 흥얼거렸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딱 맞춰지는 순간이 종종 있는데, 동갑내기라 그런가 듣고 자란 노래도, 떠오르는 기억도 닮았다.


“왜 찔레꽃 향기가 슬프다고 했을까?… 이렇게 매혹적인데 말이야. “

수풀 속,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자리에서 해마다 제때 피고, 조용히 사라지는 찔레꽃.

괜히 기특하단 생각이 든다.

슬프도록 예쁘다는 말, 아마 이런 꽃을 보고 생긴 말 아닐까 싶다.


<찔레꽃>




연분홍 꽃잎을 흩날리며 봄바람을 타던 벚꽃은 ,

어느새 초록 잎으로 자리를 바꾸고 싱그러운 터널을 만들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릴 때마다 그 사이로 파란 하늘이 살짝살짝 얼굴을 내밀고,

길 옆으로는 이름 모를 풀들이 숲 속 빈틈을 야무지게도 메우고 있었다.


평소라면 슬로조깅을 하겠지만, 오늘은 그냥 걷기로 했다.

꽃향기가 아까워서, 아니 그냥 천천히 걷고 싶은 날이었다.





걷다 보니 문득 ‘’이라는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그 단어에는 어떤 모양과 소리가 담겨 있을까?

김훈 작가는 『자전거 여행 1』에서 이렇게 말한다.


“숲이라는 말은, 그 글자의 모양이 숲 같다. 나무(木) 세 그루가 서 있다.

발음해 보면, ‘숲’ 하고 한번 걸렸다가 빠져나간다

그 소리에도 나뭇잎이 스친다.”

- 김훈, 『자전거 여행 1』. -



“숲, 숲...”

우리도 몇 번이고 ‘’을 소리 내어 봤다.

’이라는 말은 모양도, 소리도, 느낌도 숲 그 자체다.


그래서일까.

’이라는 단어를 천천히 소리 내어 부르다 보면,

어느새 그 안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

바람, 나뭇잎, 햇살, 그 사이를 걷는 우리까지도,

숲이라는 이름으로 포근히 품어준다.


5월의 끝자락, 계절이 여름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는 길목에서

우리는 오늘도 함께 걷는다.


꽃 향기 맡고, 바람결 느끼며 하루를 열 수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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