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주에서 신숙주까지

-쉽게 상하는 나물, 쉽게 말해진 이름-

by 앨리스킴


숙주를 꺼냈는데,

뜻밖에 신숙주가 떠올랐다.

나물 하나에 담긴 오해는,

어쩌면 사람을 향한 말의 무심함이었는지도.




쿠팡 로켓프레시로 장을 보다 주문 금액을 맞춰야 했다. 마땅한 게 없어 숙주나물 한 팩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배달된 숙주는 냉장고 속에 들어간 뒤, 내 기억 속에서도 숙주나물처럼 금세 흐물흐물 잊혔다.


며칠 지나 문득 떠올라 꺼내보니,

겉은 멀쩡해 보여도 안쪽은 살짝 상한 부분이 있었다. 역시 숙주는 예민한 식재료다.

나물로 무치면 하루 이틀 안에 금방 쉬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쉰 숙주”를 “신숙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여기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면 조금 달리 들린다.


신숙주? 숙주나물?


어릴 적부터 귀에 익었던 말이 있다.

“신숙주는 숙주나물처럼 쉽게 상하는 놈!”

음식 이름과 겹쳤다는 이유만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다니.

정말 그 이유 하나뿐이었을까.

그 안엔 아마, ‘변절’이라는 낙인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억눌린 감정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민간설에 따르면, 사육신의 충절에 견줘

신숙주의 ‘변절’을 숙주나물에 빗대 조롱한 것이라 한다.

쉽게 상하고 흐물흐물해지는 숙주의 모습이

그와 겹쳐졌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이런 말은 사실보다는

당대 민심이 반영된 풍자에 가까운 해석일 뿐이다.


신숙주는 누구였을까?


신숙주는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에서 학문을 익혔고, 한글 창제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문종 시절에도 국정 운영에 기여한 대표적인 충신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수양대군(세조)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고,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그의 편에 서게 된다.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시도를 막는 입장에 서면서, ‘간신’ 혹은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렇지만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역사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당시 조정은 혼란스러웠고,

어린 단종보다 실질적인 통치력을 가진 세조를 통해

백성을 위한 안정된 정치 체계를 세우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게다가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벌어졌을 때,

신숙주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세조를 설득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그는 단순한 배신자라기보다는

실리와 의리 사이에서 깊이 고민했던 인물일 수 있다는 시선도 있다.


이름 하나에 얽힌 편견


숙주나물은 사실 조선 이전, 고려 시대에도 먹던 식재료다. 『고려사』나 『향약집성방』에도 숙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신숙주 때문에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말은 시간상으로도 앞뒤가 안 맞는다.


‘신숙주 = 숙주나물’이라는 등식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 민중이 만들어낸 말장난에 불과하다.

단순한 해학이나 민중의 감정 표현으로 보아야지,

역사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해석은 아니라는 점에서 신숙주의 후손들이 억울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한 사람의 삶과 선택을,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해도 되는 걸까.

우리는 종종 이름 하나, 단어 하나로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곤 한다.

뉴스 한 줄, 누군가의 말투, 직업, 과거의 선택만으로

그 사람을 모두 안 것처럼 단정 짓는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대의 무게, 복잡한 맥락,

그리고 말 못 할 고민들까지도,

우리는 너무 쉽게 생략해 버린다.


나 역시 그런 적 없다고,

누구도 오해한 적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 비도 오고 그래서 생각이 났어~ ’


괜히 냉장고 문도 열어보게 되고, 꺼낸 숙주를 보며 부침개가 떠올랐다.

오늘은 숙주로 부침개나 만들어 먹자고 했더니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편이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나섰다.

틀림없이 막걸리 한 통 사러 간 게 분명하다.

평소에도 좀 특별한(사실은 별 특별하지도 않은) 음식이 식탁에 오르면 슬쩍

‘안주거리’라 이름 붙이며 한 잔의 핑계를 만든다.

비 오는 날 부침개야말로 공인된 안주거리 아니겠는가.


숙주 부침개를 앞에 두고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다 보니, 이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신숙주로 흘러갔다.


“그 사람, 무조건 간신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내 말에 남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 시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옳았을진 아무도 쉽게 말 못 하지…”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춘 채, 그 시절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역사와 말의 무게,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곱씹어 본 하루였다

우리가 쉽게 던진 말속엔

누군가의 오랜 시간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삶을 말 한마디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다짐만은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았다.


숙주는 쉽게 상하지만,

그 이름에 얽힌 사람까지 쉽게 상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때로는 우리가 삼키는 ‘말’이 더 날카롭고 아플 수도 있다.

그러니 오늘은 따뜻한 부침개 한 장으로

말보다 마음을 데워보기로 했다.




숙주, 부침개로도 괜찮다


숙주는 나물이나 볶음으로도 맛있지만,

의외로 부침개 재료로 활용하면 더 매력적이다.

씻어 생으로 넣기만 해도 아삭한 식감이 살아 있고,

무르지 않아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자투리 채소까지 알뜰하게 활용할 수 있어 더 좋다.



[숙주 부침개 레시피]

재료 (2~3장 분량)

•숙주 200g

•당근 약간 (채썰기)

•부침가루 5~6큰술 (또는 밀가루 4 + 감자전분 1큰술)

•달걀 1개

•물 4~5큰술 (반죽 농도 조절용)

•소금 약간

(밀가루만 사용할 경우 국간장 약간으로 간하기)

•식용유

*선택 재료: 부추, 버섯, 양파, 청양고추, 들깻잎 등 취향껏


<만드는 법>

1. 숙주는 흐르는 물에 씻고 물기를 뺀다.

(데치지 않아야 아삭함!)

2. 당근 등 자투리 야채는 얇게 채 썬다.

3. 모든 재료를 골고루 섞어 반죽을 만든다.

4. 팬에 식용유 두르고 얇게 펴서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5. 막걸리와 함께 먹는다.

(필수는 아님… 아마도)


*양념장 Tip

•간장 1큰술 + 식초 1큰술 + 물 1큰술

•고춧가루 1/2큰술 + 다진 마늘 약간 +

깨소금 + 참기름 약간

(새콤하고 칼칼한 양념장이 숙주전과 찰떡궁합!)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