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거시기, 뭐더라?”

-생각나지 않는 말, 그래도 함께라 괜찮은 날들-

by 앨리스킴


“그 거시기, 뭐더라?”

언니와 나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입 안에서만 맴도는 그 단어 하나 때문에-.




“그거 있잖아, 그게 뭐더라?”

어느 날,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무언가 말하려다 얼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과일인데, 껍질은 어두운 초록색이고, 익으면 짙은 갈색으로 변하잖아.”

나는 머릿속 이미지를 더듬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왜, 반으로 자르면 커다란 씨가 나오고,

딱딱한 씨에 칼을 콕 찔러서 휙 돌리면 빠지잖아.

속은 연한 연둣빛, 테두리는 진한 초록색.

숟가락으로 떠내면 싹, 깔끔하게 나오는 거.”


그러자 언니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과콰몰리 만들어 먹는 그거지? 샌드위치에 넣어도 고소하고 맛있고.”


“맞아, 바로 그거! 내가 지금 그걸 말하고 있었잖아.

근데…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이마를 짚으며 머릿속을 한참이나 뒤적였다.


“나도 기억이 안 나네. 맴맴 돌기만 하고 입 밖으로 안 나와.”

언니도 답답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스무고개 게임도 아니고,

이 정도면 앞글자 하나쯤 툭 튀어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언니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나는 대체 뭐지, 이 허당 기운은?


과일의 생김새와 촉감,

덜 익었을 때의 떫은맛까지 선명한데-

딱 한 글자가 목구멍 언저리에서만 맴돌아

둘 다 애가 탔다.


“이거 우리 둘 다 좀 심각한 거 아니야?”

“검색하지 말고, 끝까지 생각해 내자.”


서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언니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 보. 카. 도.”


“우~ 진짜? 말도 안 돼. 그게 그렇게 생각이 안 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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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엄마와 아버지가 나눈 대화가 불현듯 생각난다.

“어제 연속극 못 봤는데,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이 거~기 어디를 갔는데, 거기서 그 뭐시기를 만나 가지고… 그시기를 어디로 데려가서 난리가 났지, 뭐.”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엄마는 능청스레 웃으며 “아~ 그래 됐구나” 하고 맞장구치셨다.

그땐 그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부라 저렇게 통하는 거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도 그 나이가 되어보니,

‘거시기’ 한 마디면 서로 다 알아듣는 그 말속의 결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앞서는 그 세월의 언어.


나도 모르게 그런 말버릇이 입에 붙어가는 걸 보면,

세월이 어느새 나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구나 싶다.

그래서 요즘은, 이 변화를 그저 흘려보내기보다

조금이라도 붙잡아보려 애쓰고 있다.




오십을 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순간이다.

머릿속엔 그림처럼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정작 그걸 가리키는 말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자주 쓰던 단어조차 혀끝에서 맴돌다,

겹겹이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그 답답한 느낌.


이럴 때면 ‘내가 요즘 왜 이러지?’

건망증이 심해진 건 아닐까,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혹시 나만 그런 걸까 싶어, 조금 더 알아봤다.


단어가 생각날 듯 말 듯 떠오르지 않는 이 현상은

‘Tip-of-the-tongue’, 즉 혀끝 현상이라 불린다.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인지 변화 중 하나로, 특히 사회적 교류가 줄고

말을 나눌 기회가 적어질수록

언어 능력은 더 빠르게 둔해진다는 연구도 있었다.


실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노년기에 사용하는 단어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익숙한 표현만 반복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한다.

그 결과 사고의 유연성과 표현력이 서서히 저하되며, 굳어진 언어 습관은

자칫 고집스럽거나 자기 확신이 지나치게 강한 모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자주 말하고, 자주 들어야 한다.

하루 한 번,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생각나지 않는 단어는 끝까지 붙잡아본다.

뇌도 결국 ‘말의 근육’처럼,

자꾸 써야 부드럽게 움직인다.

굳지 않게, 말도 자주 꺼내 쓰고 나눠야 한다.


전문가들도 말한다.

이런 소소한 실천들이 인지 저하를 늦추는 데 꽤 효과적이라고.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아주 작은 실천을 시작했다.

‘생각 안 나는 단어, 절대 검색 먼저 하지 않기.’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실천,

‘서로에게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기.’


어느 날은 내가, 어느 날은 남편이

한 명은 읽고, 한 명은 듣는다.

목소리를 또렷하게 내보려 애쓰다 보면 집중력도 좋아지고,

억양과 리듬도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처음엔 단어가 꼬이고, 발음이 뭉개졌지만

몇 번 하다 보니 확실히 나아졌다.

심지어 우리는 녹음도 해본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내 목소리가 저래?”

서로 자기 목소리 아니라고 우기며 마주 보다가,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어색하면서도 우스워서,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또박또박 다시 읽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던 남편은

“내가 이렇게 사투리를 많이 써?” 하며 낄낄댄다.

경상도 억양에, 단어까지 죄다 토박이라 스스로도 우스운 모양이다.

서울살이가 더 오래됐는데도, 입에 밴 말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남편을 보며 나는 ‘아이고 참-’ 하곤

결국 따라 웃고 말았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그 말투.

익숙하고, 우습고, 그래서 더 정겹다.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읽으려 애쓰다 보면

어느새 우리 목소리에 리듬이 생기고,

말이 점점 더 살아나는 걸 느낀다.


나이를 핑계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무기력하게 놓아버리면,

무뎌지는 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한 사람은 책을 읽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책을 읽다 말고,

혀끝에서 맴돌던 단어 하나를 두고

한참을 더듬다가 겨우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둘 다 동시에 “맞다, 그거!” 외치며

하이파이브라도 칠 기세로 깔깔 웃었다.


단어 하나 건져 올린 걸로 이렇게 기뻐할 일인가 싶지만,

그게 또 우리답다 싶어 한 번 더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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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시기, 뭐더라…”

그 말 한마디로

오늘 하루도 무사히, 유쾌하게 마감이다.


언제는 아보카도가 떠오르지 않았고,

오늘은 또 다른 단어가 혀끝에서 미끄러졌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여전히 말하고, 듣고,

같이 웃고 있으니까.

그러니 내일도,

거시기 덕분에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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