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사탕들이 많아 찾고 있던 차에 어떤 노부부도 함께 나처럼 흑사탕을 찾고 있었다. 온 김에 몇 봉지 사서 쟁여둬야지 하며 고르는데 노부부는 흑사탕을 한 박스를 샀다. 저 할머니는 얼마나 흑사탕을 좋아하면 상자째로 살까? 놀라고 의아해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먹는 사탕이 바로 흑사탕이다.
한 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기본으로 두 개는 먹어야 그 맛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맛의 소중함을 지키고 싶은지 사탕은 속지에 쌓여있고 겉은 검정과 빨강의 유혹으로 덮여 있다. 달콤함 속에 좀 더 깊은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는 듯한 달달함이, 블랙스완의 치명적인 유혹의 맛이다.
크리스피 도넛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좋아한다.
독립하여 우리와 떨어져 사는 딸이 가끔 사 온다. 그중에서도 녹은 설탕이 마구마구 발라지고 매우 기름진 달콤함의 끝판왕을 좋아한다. 평소 조금이라도 단맛이 나는 쿠키나 케이크, 마카롱 등은 전혀 먹지 않으면서 이것을 먹는 나를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한다. 나도 이상하다. 한 입 베어 먹으면 입안에 사르르 퍼지는 기름진 달콤함의 덫에 빠진 기분이다. 먹고 나면 기분이 좋다. 화이트 스완쯤 된다.
뒤늦은 갱년기, 몸도 힘들고 마음도 꿀꿀하다.
단 것이 땡긴다. 흑사탕을 찾는다. 잠시 입안에서 굴리다 깨트려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늘어졌던 몸과 마음이 반짝하며 되살아난다. 힘도 나고 꿀꿀함도 덜하다. 나의 첫 번째 소울 달콤함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할머니도 흑사탕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소울 달콤함이었나 보다. 살아온 세월이 나보다 훨씬 더 많으니 흑사탕이 많이 필요했나 보다.
두 번째 소울 달콤함, 도넛은 딸이 사 올 때만 먹는다. 딸이 사다 주는 그 마음이 좋아서, 엄마 먹으라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며 조심스럽게 들고 오는 그 손이 예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맛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도넛을 맛있게 먹으면 딸은 맛있게 먹는 엄마의 모습에 흐뭇해한다. 그래서 나는 더 좋아하며 먹는다. 도넛은 한 개면 족하다.
요즘 들어 사랑이의 귀가 많이 안 좋아졌다.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꼬리도 살랑거리지 않는다. 그런 사랑이가 안쓰러워 안고 있는 모습을 남편이 사진을 찍었다. 이튿날, 카톡으로 내게 보내주며 “할매와 할배”라고 썼다. 예쁘기만 했던 사랑이도, 마냥 젊기만 할 줄 알았던 내가 늙은 모습으로 찍혀 있었다.
사랑이의 노화는 꿀꿀함을 넘어서 안타깝고 슬프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랑이가 너무 안쓰럽다. 사진을 보고 멍, 가슴이 툭 내려앉았다. 흑사탕도, 딸의 도넛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남편의 카톡이 다시 왔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남편이 또 치킨을 사 왔다.
여전히 잠을 못 자고 뾰족한 나를 달래기 위함이다. 어제의 나는 치킨이 없어도 괜찮았다.
남편의 말이 최강의 소울 달콤함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흑사탕을 주문했다.
택배 상자에 꽤 많이 들어 있었다. 나도 그 할머니처럼 흑사탕이 많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문득 며칠 전 남편이 보내온 시, 신종승 님의 <소소한 일상>이 생각났다.
남편은 시처럼 날 위해 고맙다고 힘내라고 늘 말한다.
남편은 시처럼 노란 감귤 대신 치킨을 주고 흑사탕을 주문해준다.
그래도 요즘 자꾸 남편의 말이 거슬린다. 이 말은 이래서 싫고 저 말은 저래서 싫다고, 부부간에도 회복적 언어가 필요하다며 나에게 말조심하라고 잔소리한다. 정작 내 말은 갱년기를 이유로 달콤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둘 다 삐걱거리지 않아 다행이지만 반쪽의 달콤함은 아슬아슬하다. 남편도 갱년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