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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Nov 19. 2020

꿀꿀할 땐 서로 달달하게

흑사탕, 도넛, 따뜻한 말

몇 해 전, 흑사탕을 사러 대형마트에 갔다.

비슷한 사탕들이 많아 찾고 있던 차에 어떤 노부부도 함께 나처럼 흑사탕을 찾고 있었다. 온 김에 몇 봉지 사서 쟁여둬야지 하며 고르는데 노부부는 흑사탕을 한 박스를 샀다. 저 할머니는 얼마나 흑사탕을 좋아하면 상자째로 살까? 놀라고 의아해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먹는 사탕이 바로 흑사탕이다.

한 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기본으로 두 개는 먹어야 그 맛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맛의 소중함을 지키고 싶은지 사탕은 속지에 쌓여있고 겉은 검정과 빨강의 유혹으로 덮여 있다. 달콤함 속에 좀 더 깊은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는 듯한 달달함이, 블랙스완의 치명적인 유혹의 맛이다.   

 

크리스피 도넛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좋아한다.

독립하여 우리와 떨어져 사는 딸이 가끔 사 온다. 그중에서도 녹은 설탕이 마구마구 발라지고 매우 기름진 달콤함의 끝판왕을 좋아한다. 평소 조금이라도 단맛이 나는 쿠키나 케이크, 마카롱 등은 전혀 먹지 않으면서 이것을 먹는 나를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한다. 나도 이상하다. 한 입 베어 먹으면 입안에 사르르 퍼지는 기름진 달콤함의 덫에 빠진 기분이다. 먹고 나면 기분이 좋다. 화이트 스완쯤 된다.

   

뒤늦은 갱년기, 몸도 힘들고 마음도 꿀꿀하다.  

  

단 것이 땡긴다. 흑사탕을 찾는다. 잠시 입안에서 굴리다 깨트려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늘어졌던 몸과 마음이 반짝하며 되살아난다. 힘도 나고 꿀꿀함도 덜하다. 나의 첫 번째 소울 달콤함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할머니도 흑사탕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소울 달콤함이었나 보다. 살아온 세월이 나보다 훨씬 더 많으니 흑사탕이 많이 필요했나 보다.     


두 번째 소울 달콤함, 도넛은 딸이 사 올 때만 먹는다. 딸이 사다 주는 그 마음이 좋아서, 엄마 먹으라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며 조심스럽게 들고 오는 그 손이 예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맛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도넛을 맛있게 먹으면 딸은 맛있게 먹는 엄마의 모습에 흐뭇해한다. 그래서 나는 더 좋아하며 먹는다. 도넛은 한 개면 족하다.    


요즘 들어 사랑이의 귀가 많이 안 좋아졌다.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꼬리도 살랑거리지 않는다. 그런 사랑이가 안쓰러워 안고 있는 모습을 남편이 사진을 찍었다. 이튿날, 카톡으로 내게 보내주며 “할매와 할배”라고 썼다. 예쁘기만 했던 사랑이도, 마냥 젊기만 할 줄 알았던 내가 늙은 모습으로 찍혀 있었다.  

  

사랑이의 노화는 꿀꿀함을 넘어서 안타깝고 슬프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랑이가 너무 안쓰럽다. 사진을 보고 멍, 가슴이 툭 내려앉았다. 흑사탕도, 딸의 도넛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남편의 카톡이 다시 왔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남편이 또 치킨을 사 왔다.

여전히 잠을 못 자고 뾰족한 나를 달래기 위함이다. 어제의 나는 치킨이 없어도 괜찮았다.

남편의 말이 최강의 소울 달콤함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흑사탕을 주문했다.

택배 상자에 꽤 많이 들어 있었다. 나도 그 할머니처럼 흑사탕이 많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문득 며칠 전 남편이 보내온 시, 신종승 님의 <소소한 일상>이 생각났다.   

 

남편은 시처럼 날 위해 고맙다고 힘내라고 늘 말한다.

남편은 시처럼 노란 감귤 대신 치킨을 주고 흑사탕을 주문해준다.

그래도 요즘 자꾸 남편의 말이 거슬린다. 이 말은 이래서 싫고 저 말은 저래서 싫다고, 부부간에도 회복적 언어가 필요하다며 나에게 말조심하라고 잔소리한다. 정작 내 말은 갱년기를 이유로 달콤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둘 다 삐걱거리지 않아 다행이지만 반쪽의 달콤함은 아슬아슬하다. 남편도 갱년기이기 때문이다.    


남편도 요즘 흑사탕을 자주 먹는다.

그도 꿀꿀하며, 달콤함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흑사탕의 블랙스완 같은 치명적인 달콤함도 좋다

설탕이 마구 발린 도넛의 기름진 달콤함도 좋다.

그래도 서로에게 보내는 따뜻한 말 한마디의 달콤함이 가장 달달하다.    


꿀꿀할 땐 서로 달달하게 ,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은 그에게도 위로가 되는 말이다.

이것이 최강의 소울 달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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