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마당에 나타났다. 처음 그 아이들을 봤을 때 사진으로만 봤던 메이쿤 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덩치가 보통 길고양이의 두 배는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메이쿤은 고양이 중에 가장 큰 종으로 덩치가 크고 털이 많아 얼핏 보면 야생동물로 착각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키우는 사람이 별로 없어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사진으로만 봤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귀 끝에 뾰족하게 올라와 있는 털, 커다란 덩치, 복슬복슬하고 길게 온몸을 덮은 장모, 사자와 비슷하게 생긴 주둥이 모양까지 그 아이들은 영락없이 메이쿤인 것 같았다. 오랜 검색 끝에 알게 된 사실은 최근 노란색과 회색 두 마리를 짝지어서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가 본 그 아이들 그랬다. 생김새는 똑같이 생겼는데, 한 마리는 노란색, 한 마리는 회색이었다. 아마도 누군가 유행을 따라 두 마리를 같이 분양받아 키우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메이쿤은 분양가도 상당히 비싸서 분명 누군가 잃어버린 아이들이라 생각했다.
집에 길고양이를 위해 사둔 간식 캔이 있어 그 아이들에게 주니 회색 아이는 도망가고 노란 아이는 나에게 몸을 비비며 친근함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내가 준 먹이를 말끔히 먹었다. 주인이 애타게 찾고 있을 텐데, 어떻게 주인을 찾아줘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도망간 회색이는 보이지 않고, 노랑이는 우리 집 데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을 찾아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이웃집에서 그 아이들에 관한 얘기를 듣고 와서 나에게 전해주었다. 잘 차려입은 여자가 고급 자동차에서 커다란 고양이 두 마리를 내려놓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 아이들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버림받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분명 알았을 것이다. 집에서만 살면서 주인에게 돌봄을 받던 고양이들은 길에서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자기 집 식구를 어찌 죽으라고 내몰 수 있단 말인가. 생명이 있는 존재를 물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다 버린 것이다. 버림받았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이 아이들이 더 측은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을 거둘 자신이 없었다. 얼마 전 우리 집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가 그 마음의 상처가 아직 깊게 남아있어 다른 고양이를 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 아이들이 길에서 잘 지낼지 걱정되어 데크에 남은 사료를 놓아두었다.
삼 일째 되는 날 아침 일어나 밖을 보니 여전히 노랑이가 부엌 데크 앞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 집에 있던 간식캔을 잘 먹어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아이는 사료를 먹지 않고 간식만 먹으려고 했다. 캔과 츄르 같은 간식만 먹는 것이다. 우리동네는 길고양이를 위해 사료를 챙겨주시는 분들은 많지만, 간식을 주시는 분들은 없다. 나도 집에 남는 사료가 있어 챙겨줬지만, 간식을 따로 사서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노랑이도 자기 처지에 맞게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지 않는 노랑이가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사료를 줬으니 내 할 도리는 다했다고 자신을 스스로 위로했다. 난 노랑이가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리라 생각했다. 동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보름이 넘어가니 노랑이는 등뼈가 드러나게 말랐다. 그래도 바로 코앞에 있는 사료는 먹지 않았다. 곧 굶어 죽을 것만 같았다. 우리 집에서 캔을 얻어먹은 기억이 있으니 우리 집 데크에 앉아 온종일 나를 기다렸다. 부엌 식탁에 앉아 있으면 데크에서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랑이와 가끔 눈이 마주쳤다. 잠깐 마주친 눈빛을 잡으려고 노랑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몸도 움찔움찔하며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 애썼다. 그때마다 못 본 척 눈을 돌렸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데크 앞에 내놓은 사료는 그대로였다. ‘앞에 먹을 게 있는데, 그거 먹으면 되잖아!’하고 화도 내고, ‘굶어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해!’ 달래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노랑이가 우리 집 데크에 앉아 나를 기다린 지 2주가 지났을 때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말라가는 아이를 보다 못해 가장 저렴한 캔을 한 상자 주문한 것이다. 남편은 동물이 주는 대로 먹어야지 가려먹는다며, 캔만 먹으려고 하는 노랑이를 못마땅해했다. 그래도 난 이 아이가 굶어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일이 있었던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우리 집 마당을 획 가로질러 가는 회색이를 목격했다. 회색 아이는 사람을 보고 도망갔기에 보살핌을 받지 못할 텐데, 잘 지낼지 걱정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금방 새로운 생활에 적응한 것 같았다. 털 상태도 좋아 보이고, 처음 봤을 때와 외모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동네 어디 어디를 가면 사료를 얻어먹을 수 있는지 파악하고 잘 얻어먹고 다니는 것 같았다.
벌써 노랑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지 반년이 되었다. 그 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주방 쪽 데크로 가서 노랑이가 와있는지 확인한다. 언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 보면 벌써 와서 나를 기다린다. 그리고 캔을 하나 얻어먹는다. 그게 내가 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친절이었다. 온종일 우리 집에 앉아 있었는데, 요즘 노랑이는 아침마다 우리 집에 와서 밥을 얻어먹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나타난다.
가장 저렴한 캔은 500원이니, 한 달이면 15,000원이다. 내가 한 달에 커피 3잔만 안 마셔도 이 아이를 위해 캔을 사줄 수 있다. 내 용돈에서 하루 500원 절약하여 이 아이게 사료를 사준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는 하루 500원으로 인생을 연명해가고 있다. 보호소에 보내면 안락사될 수도 있고, 성묘인 아이를 받아줄 좋은 새 주인을 찾아주기도 힘들 것 같았다. 뭔가 더 해주고 싶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루에 캔 하나씩 사주는 것 말고는 없다.
나는 매일 아침, 이 아이에게 밥을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제 아침에 밥을 먹으러 오지 않으면 어디 아픈지 걱정이다. 싫든 좋은 내 식구가 된 것이다. 나로 인해 한 생명이 살아간다. 아침에 이 아이에게 밥을 주고 나면 하루치 착한 일을 다 한 것 같아 마음이 꽉 차 오른다.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 이 아이도 나로 인해 조금은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길 바라본다. 의도하지 않게 길에 살게 되었지만, 노랑이가 그 삶에서 행복을 찾아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