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초원이 펼쳐진 언덕에 커다란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봄날이었지만 나무 아래는 넓은 그늘이 져 시원했다. 그 나무 아래 엄마와 작은 아기 여우가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아니 자는 것처럼 보였다. 미동도 없는 엄마와는 달리 작은 여우는 어디가 불편한지 꿈틀거리며 조금씩 움직였다. 한참을 누워있어서인지 작은 여우는 이제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하지만 꼼짝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눈을 뜨는 게 무서웠다.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허기 때문에 정신을 차라기 힘들었지만, 그럴수록 뜨고 싶은 눈을 더 꼭 감았다. 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렸는지 모르겠다. 늦은 봄날의 열기 때문에 더웠지만 작은 여우의 시간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안녕”
갑자기 어디선가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누군가가 작은 여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지금은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지나갈 거라 생각하고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잘못들은 것이라 치부했다. 그때 한 번 더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안녕"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작은 여우에게 누군가 말을 걸고 있었다.
'주위에 인기척이 없었는데, 누굴까?’
작은 여우는 누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지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기로 결심했으므로 볼 수가 없었다. 눈은 뜨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앞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꼬리가 움찔하고 움직이고 말았다.
“그래 너 말이야!”
‘나를 부르는 게 맞았어! 도대체 누구지?’
작은 여우의 심장이 요동쳤다. 눈을 뜨고 앞을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엄마를 배신하는 거야. 절대 눈을 뜨면 안 돼’
작은 여우가 이 자리로 와 엄마 옆에 누웠을 때 그는 엄마 곁을 지키겠다고 결심했었다. 엄마가 계속 이 자리에 누워있다면 자기도 엄마와 똑같이 누워있기로 말이다. 그의 견고한 마음은 단단한 겨울의 어름처럼 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단단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따뜻한 봄볕에 아주 조금씩 녹아 아주 작은 틈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들린 다음 한 마디에 그 작은 틈은 쩍 하고 벌어지고 말았다.
“아까부터 너를 보고 있었어.”
‘뭐라고? 언제부터 내 앞에 있었던 거지? 살짝 실눈만 뜨고 봐야겠다. 그건 움직이는 게 아니잖아.'
작은 여우는 한쪽 눈을 살짝 뜨고 앞을 보았다. 그런데 실눈을 떠서 그런지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 빛이 그의 눈 속으로 들어와서일까. 작은 여우는 순간 자신을 부르는 것을 찾는 것 말고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렸다. 그의 궁금증은 폭발하고 말았다. 견고했던 다짐은 한순간의 폭발로 다 녹아 순식간에 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작은 여우는 고개까지 빼어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래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야, 여기”
작은 여우는 그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땅 위에 작은 민들레 홀씨가 앉아 있었다.
“지금 씨앗 네가 말하는 거야?”
“맞아”
드디어 여우가 자신을 발견해 준 게 기뻤는지 민들레 홀씨는 작은 솜털 팔랑거리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