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는 늙은 개에게 머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하고 다시 해가 뜨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여우는 바람에 섞여있는 소금 냄새를 맡았다. 바다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온몸이 알려줬다.
다음 언덕만 넘으면 바로 바다가 보일 것이다. 여우 자신도 알지 못했던 감각들이 깨어나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아 여우는 밤새도록 달렸다. 그때 갑자기 후두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내리는 빗방울 크기로 보아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여우는 멈춰서 쉴 곳을 찾았다. 근처 큰 나무가 보여 나무아래로 비를 피하려는 순간 갑자기 푹 땅이 꺼져버렸다.
"으악!"
너무 놀란 여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하지만 여우의 비명은 아무에게도 닿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알아차릴 수도 없었다. 사방이 어둠이었다. 떨어진 충격으로 여우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우는 커다란 구덩이에 빠진 것이다. 비까지 와서 구덩이 벽은 진흙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여우가 올라가 보려고 발버둥 쳐봐도 다시 미끄러질 뿐이었다.
구덩이에서 벗어나려 한참을 버둥거리던 여우는 마침내 지치고 말았다. 구덩이 구석에 앉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민들레를 만나지 못할 거야.'
암울한 생각이 비에 젖은 여우의 온몸을 더욱 차게 만들었다. 여우는 늙은 개가 맞이했던 마지막 순간이 자신에게도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코 앞이 바다인데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니,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위해서 낙엽이 부스럭 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 누가 빠진 거야?"
여우가 올려다보니 거기 여자 여우가 있었다.
"이 구덩이에 누군가 빠질 것 같았어."
그녀는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물어봐 구덩이에 떨어뜨려줬다.
"이제 나뭇가지를 밝고 서서 앞발을 내밀어봐. 내가 끌어올려줄게."
여우는 구덩이에서 빠져나와서야 비로소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막 떠오른 붉은 해가 그녀의 황금빛 털을 아름답게 빛내주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여우는 자기 심장이 이렇게 빠르고 힘차게 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너 이 근처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어디서 왔어?”
“난 서쪽에서 왔어. 바다를 보러….”
"바다라면 바로 앞에 있잖아."
여우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구덩이에 빠질 땐 밤이어서 알아채지 못했는데 정말로 바로 앞에 바다가 있었다. 여우는 자신도 모르게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뒤에서 그녀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드디어 여우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섰다. 바다는 정말로 끝없는 파랑으로 펼쳐져있었다. 그리고 수없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푸르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여우는 이 멋진 장면을 민들레와 같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른 다시 돌아가 바다를 직접 봤다고 얘기한다면 민들레가 얼마나 좋아할까?’
여우는 혼자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믿기 수 없었다. 진짜 바다를 본 것이다. 여우는 아무리 봐도 물밖에 없는 바다가 마치 세상의 끝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이라도 여기서 바다를 바라봐도 지겨울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눈에 띄게 서 있는 건 위험해. 여기는 사냥꾼이 자주 오는 자리야.”
여우는 순간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바다에 이끌려 그녀의 존재는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혼자 달려왔다는 게 창피했다. 순간 여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런 그를 웃으며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는 위험하니 아래로 내려가자. 이 근처에 내 동굴이 있어. 어디 다치진 않았나 봐?”
여우는 뭐에 홀린 듯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의 동굴은 아늑했다. 동굴 앞쪽에 덤불 때문에 동굴은 밖에서 잘 보이지 않았고, 동굴 안쪽은 둘이 있기에도 좁지도 넓지도 않았다.
“너 혼자 있어?”
동굴을 둘러보고 난 여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응, 얼마 전까지 엄마와 형제자매들과 같이 있었는데 모두 헤어졌어. 이제 혼자야.”
가족이 있는데 헤어져 산다는 얘기에 여우는 놀라서 물었다.
“왜 헤어진 거야?”
“무슨 소리야? 때가 되었으니까 각자 자기 길을 선택한 거지.”
여우는 더 묻고 싶었지만 물어본다고 궁금증이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아 지금은 침묵하기로 했다. 여우는 자신이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우가 조용히 있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바다는 왜 보러 왔어?”
여우는 문득 자신이 잠깐이지만 그녀와 얘기하는 동안 민들레를 까먹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나무를 떠나온 후 한순간도 민들레를 잊은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냥 보고 싶어서.”
여우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입 밖으로 그 나무와 민들레 얘기를 꺼내기가 무서웠다. 그토록 소중한 기억이었는데, 갑자기 모두 잊어버리고 싶어졌다. 밝게 웃는 그녀에게 자신의 어두운 이야기를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다시 떠날 거야?”
그녀가 물었다. 여우는 생각지 못한 질문에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른 민들레에게 돌아갈 생각밖에 없었으면서 말이다.
”아니 여기 조금 있어 보려고 너만 괜찮다면.”
그녀는 여우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좋아. 한동안 혼자여서 외로웠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