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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rMe Oct 23. 2024

붉은여우와 늙은 개

너에게 바다를 들려줄게 7


 여우는 쉬지 않고 한참을 달렸다. 중간에 쉬었다 가는 다시 민들레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았다. 더 이상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달렸을 때 멈춰 섰다.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풍경밖에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쉴 공간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여우 코끝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아침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서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하룻밤 쉬어가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여우가 동굴로 들어서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여우를 불러 세웠다.


“어이, 너는 누군데 남의 집에 들어가려는 거야?”


뒤를 돌아보니 놀랍게도 거기에는 털색깔이 새빨갛게 붉은여우가 있었다. 여우는 자기와 닮은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다그쳐 묻는 그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넌 말을 못 해? 왜 대답이 없어?”


”아!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난 서쪽에서 왔어.”


여우는 그의 다그침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가 어디서 왔던 관심 없고, 여긴 내 영역이니까 얼른 나가!”


 그는 이제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상대의 위협적인 행동에 여우는 겁이 덜컥 났다. 여우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낮추고 꼬리를 내렸다.


“네 영역에 침범하려는 아니야. 난 바다로 가고 있어. 오늘 하룻밤만 보내려고 한 거야.”

 붉은여우는 이까지 들어내며 으르렁 거렸다. 말로만 경고하는 게 아니라 계속 머물면 진짜 공격을 받을 것 같은 위협이 느껴졌다. 


“뭐 바다? 무슨 소릴 하는지 난 모르겠고 어서 가버려.”


 여우는 더 이상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여우는 춥고 무서웠다. 그리고 가슴이 시리게 외로웠다. 민들레가 너무나도 그리운 밤이었다.     


 그 후로 여우는 며칠을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렸다. 그냥 앞만 보고 가고 있었다. 이제 여우에게 남은 것은 민들레와 한 약속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어서 바다에 닿아야 했다. 열심히 달리던 여우는 멀리 들판 한가운데 누워있는 또 다른 여우를 발견했다. 그도 지난번에 만난 붉은여우처럼 자기를 위협할 것 같았다. 그런데 무서움보다 외로움이 더 강했다. 며칠 동안 말을 하지 못한 여우는 누군가와 얘기가 너무 하고 싶었다. 여우는 들판에 누워있는 이에게 조심조심 다가갔다.


“네가 원한다면 나를 먹어도 좋아.”


누워있던 이가 갑자기 말을 했다. 여우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여우를 먹어!”


”아! 난 여우가 아니야. 개란다. 늙은 개.”


 여우가 살펴보니 엎어져 있어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는 여우와 달랐다. 여우보다 훨씬 뚱뚱하고 다리도 짧았다. 털 색깔과 귀 모양이 비슷해서 그렇지 한번 알아차리고 나니 어떻게 착각했나 싶었다. 그는 영락없는 개였다.


”그런데 늙은 개야, 너는 왜 들판 한복판에 누워있는 거야?”


”아! 난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


 여우는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자기를 먹으라는 둥, 죽는다는 둥….”


“흠 그렇지.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도 같다. 생각해 보니 나도 죽기 전에 내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기도 했어. 너 지금 시간 있니? 얘기를 다 듣고 배가 고프다면 나를 먹어도 좋아.”


 여우는 개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 네 얘기를 들어줄게. 대신 먹으라는 말은 인제 그만해줄래?”


 늙은 개는 여우를 보고 싱긋 웃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난 말이야 태어나자마자 한 부부에게 입양되었어. 그리고 그들과 평생을 살았지. 그 사람들은 나를 예뻐해 주고, 잘 보살펴줬어. 내가 아기일 때도 젊었을 때도 지금처럼 늙어서도 말이야.”


”너를 사랑해 주는 가족들이 있는데 왜 여기서 죽는다는 거야?”


 여우는 얘기를 듣다가 화가 나서 외쳤다.


“가족들은 안 변했는데, 내가 변했어.”


 슬픈 눈을 한 늙은 개가 말했다.


“내가 청년일 때 그 부부는 아이를 한 명 낳았어. 우리는 같이 자랐지. 마치 형제처럼 말이야. 우리는 같이 뛰어놀고, 같이 잠을 잤지.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에게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어. 그런데 그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세졌고, 반대로 난 약해져 갔지. 난 더는 젊었을 때처럼 그 아이와 함께 뛰어줄 수가 없어.”


 여기까지 얘기한 늙은 개의 늘어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늙은 개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지만 흘러나오는 눈물은 멈추지는 못했다.


“이제 같이 뛰어놀아 주지도 못하는데, 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 아이가 지켜봐야 한다는 건 그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야. 내가 죽는 걸 그 아이가 보면 분명 상처받을 거고, 난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난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어. 그래서 가족들이 잘 때 몰래 집을 빠져나왔지. 이 넓은 벌판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하려고 말이야. 난 나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 결정해 후회는 없어. 그런데 이렇게 너를 만났으니, 네가 나를 먹어 너에게 필요한 영양분이 되는 것도 좋을 일 같았어. 네가 들판을 자유롭게 달릴 수 있도록 말이야.”

 

 늙은 개의 눈이 여우를 보고 웃었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여우는 늙은 개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우는 사랑받으며 산 늙은 개가 아무도 없는 벌판에 혼자 죽어간다는 건 너무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늙은 개와 곁을 지켜준다면 죽음도 그리 무섭지 않을 것이다. 여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 늙은 개를 보며 말했다.


“좋아.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네가 죽을 때 말이야.”


 늙은 개는 싸울 기운도 없다는 듯 처음 만났을 때처럼 들판에 다시 누웠다. 그러고는 여우를 향해 고개를 작게 들어 끄덕였다. 그건 여우의 제안을 승낙한다는 표시 같았다. 여우는 늙은 개 옆에 붙어 누었다. 여우는 늙은 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느리지만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늙은 개의 심장을 느낄 수도 있었다. 여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래 있었을까. 여우가 눈을 떠보니 동쪽에서 해가 뜨고 있었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 늙은 개를 보았다. 늙은 개는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어제 느꼈던 따듯했던 온기도 사라지고 없었다.


’ 안녕, 안녕, 나의 늙은 친구여, 가족에게 사랑받았던 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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