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사람은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괴물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참 불행한 일이다. 이미 자아가 있고, 그걸 남들이 보는 게 아니라 남들이 보는 게 곧 자아가 된다. 그들의 말이 맞든 틀리든, 그 말은 중력을 갖고 실제의 나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한번 만들어진 중력은 주변을 쉴새없이 빨아들인다.
나르키소스의 불행은 거울과 그가 분리되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한번 본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결국 과거의 불행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너에게 들은 말을 잊을 순 있어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망각은 대개 타인에게 불행을 전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불행을 내 선에서 끝내고 싶다.
거울 보기가 괴로워 거울을 거부하면서 살았다. 타인은 외부에 있는 거울이다. 그렇게 혼자 살 수 있을거라 믿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모든 물건을 학교에 두고 자급자족하려 노력했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를 연습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받지않는 게 편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혼자 고인처럼 누워있는 것으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남의 손을 잡아야 했다. 결국 누군가 끌어올려야 숨쉴 수 있는게 물 안이었다.
처음으로 틀리지 않고 다르다 해주는 장소에 왔다. 다른 걸 예쁘다 해주는 장소에 왔다. 처음 예쁘다는 말을 들었을 땐 믿지 않았다. 농담이거나 쟤가 이상한 것이라 생각했다 - 말이란 게 참 무섭다. 사람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게다가 생각이란 건 내가 여태까지 들어왔던 말들로 이루어진다. 결국 완전한 나의 언어란 없다. 내가 나의 환경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다르게 말하면 환경이 변하면 생각이 변한다는 소리기도 하다. 이미 들은 걸 지울 순 없지만 그만큼 다른 거울들을 많이 보면된다. 들어오는 예쁜 말들이 많아진다. 중력이 다른 쪽으로 기울고 있다.
나는 예쁘다.
나도 네게 그런 거울이 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한 거울이다. 거울과 거울이 마주하면 무한한 상(狀)을 형성한다. 자신의 모습이 상대의 표면에 튕겨 본인에게로 돌아오면 비틀린 표정은 균형을 맞추게 될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균형을 갖고자 하는 게 그저 살아간다는 게 아닐까. 불행이 없는 삶이란 불가능해 물에 빠져 죽는 이유는 물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 생각해. 물 만큼 뭍도 높아지면 반쯤은 물 밖에 서있게 될지도 몰라. 우리는 특이하게도 같은 위치에 서서 너의 다름을 비춘다.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말하는 너의 무게만큼 내가 기울어질거라 믿어. 당신에게도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