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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Dec 21. 2020

다시 탑정으로

[41~44일차]


역시나 코로나로 인한 숙소 대기는 하루만에 끝이 나고, 다시 출근이 시작된다. 이래도 되나, 하면서 은근슬쩍 일이 시작되는 것이 이 동네의 묘미. 검사를 받았던 확진자와 접촉한 친구도, 검사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출근해서 일을 시작한다. 뭐 그런 식이다.


확진자와 접촉시 격리라는 원칙을 지키자니, 공사 업무가 차질이 생겨 한없이 늘어지며 심하면 파산까지 갈 것이고, 지키지 않자니 인부들의 생명은 물론이고 오히려 더욱 확산되어서 진짜 업무 마비가 올 수도 있으니 또 파산할 지도 모르고.


사람의 생명이 우선, 코로나 확진 시 접촉자 전원 격리라는 상식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있겠냐마는, '생명'과 '생업' 두 개를 놓고 자신 있게 저울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생(生)명도, 생(生)업도, 둘 다 살자고 필요한 것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확률 낮은 위험보다 당장 눈앞에 다가오는 자본주의적 죽음이 때로는 더 치명적일 지도 모른다.


뭐 굳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래서 회사가 취한 선택은 바로 지금처럼 관리를 하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 벌어지지만 않으면 이득이 되는 일이고, 일이 터지면 그때 가서 멈춘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정말 자주 보게 되는, 세상이 돌아가는 불편한 이치다.


뭐 그러는 와중에 나의 근무지는 약간 바뀌었다.


주탑 하부로 배정을 받아 안도하던 것도 얼마 되지 않아, 결국 나는 탑의 꼭대기인 '탑정'으로 올라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간 현장에 이리저리 적응을 해서 그런지 높은 곳에 대한 공포는 많이 사라진 상태다. 다만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기계(비록 더 다루기 쉬운 간단한 기계이긴 하지만)에 새롭게 적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 스트레스로 작용할 뿐.


탑정에 처음 올라갔던 날을 기억한다.


그곳에서 처음 마주친 '탑정의 반장님들'의 얼굴은 마치 뱃사람의 그것과도 같았다. 햇빛에 까맣게 탄 피부와 거친 말투, 부산 사투리(고향의 말이건만), 어딘지 모르게 터프한 분위기의 이곳 반장님들의 느낌은 하부나 앵커리지의 뭔가 하얀 얼굴과 점잖은 것 같은(착각인가) 다른 반장님들의 느낌과 전혀 달랐다. 마치 갑자기 항구, 아니 배에 올라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떤 끈끈함이 있었다. 직접 이름을 불러주며 밥을 먹으라고 챙겨주고, 좁은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국을 퍼다 나눠먹으며 한국인들과 터키인들과 함께 허허 웃는 모습들은 어딘지 이곳의 사람들은 '식구'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래, 밥을 함께 먹으면 식구인 것이지.

다시 올라온 탑정에서 나는 이제 '풍경'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어떤 여유가 생겨 있음을 깨닫는다. 가까이 가기도 싫던 난간에 이제는 팔을 하나 턱 걸치고, 안개가 낀 아래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놀라운 느낌도 든다. 이제야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적어도 경치 하나만큼은 최고인 근무지.


비록 가장 힘든 현장이지만, 지나고나면 가장 큰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할 터이다. 어차피 경험을 하러 온 것이니 기왕이면 진한 경험을 하는 것도 좋겠지.


물론 그것은 '지나고 나면'의 일이다.


바다 위, 300미터 높이, 겨울, 10시간(물론 언제나 그 이상) 근무라는 악조건은 하루하루 출근하는 것 자체를 쉽지 않게 만든다. 주로 이곳에서 나를 괴롭히는 가장 큰 악조건이란 바로 '바람'인데, 정말 상상할 수 없었던 바람이 탑에 오른 그 순간부터 내려가는 그 순간까지 쉬지 않고 불어 내 몸을 후려친다. 비록 터키의 겨울이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더 따뜻한 편이라고는 해도, 겨울은 겨울이다. 옷을 다섯, 여섯 겹 껴 입는데도 한번 바람이 제대로 부는 날이면 하루종일 정신을 못 차리고 벌벌 떨다가 내려간다. 그저 하는 일 없이 가만히 대기를 한다고 해도 숙소로 돌아가면 추위와 피로(이곳엔 따로 앉을 장소가 없다)로 녹초가 되기 십상이다.


물론 진짜로 힘든 것은 반장님들이다.


알바생인 우리들은 그나마 안전한 장소에서 무전을 듣고 스위치만 딸깍거리면 된다. 그냥 대기만 하는 시간도 굉장히 많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작업을 하는 반장님들은 진짜로 위험한 장소에 몸을 던져가며, 쉬지 않고 일을 한다. 물론 그 만큼 생각보다 정말 많은 돈을 받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든 일이 아닌 건 아니다. 나라면 그 돈을 받더라도 결코 하지 않을 것.


그래, 얼마를 준다고 해도 하고 싶지는 않다.


높이에 적응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슬아슬한 곳에 가서 작업을 하는 반장님들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아찔한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마치 비행기를 탔을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흔들리는 비행기 날개를 보며 불길한 상상을 하곤 했던 것처럼, 저런 모습을 보며 뭔가 불길하고 위험한 상상을 하게 되는 건 막을 수가 없다.


시시각각, 매일매일 변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모습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뭐 어찌됐든 이렇게 내 탑정의 생활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일이 끝나고 무사히 호이스트(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갈 때의 안도감은 은근히 중독적이기도 하다. 세찬 바람을 피하려 그나마 덜 들어오는 구석진 곳을 찾아 피신할 때의 즐거움(?) 역시.


가장 높고 극한 환경인 이곳에서, 역설적이게도 슬슬 여유라는 것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하는 하루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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