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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Dec 30. 2020

케밥에 대하여

[45일차]


케밥이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아마도 초등학교 때 다니던 미술학원의 한구석 책꽂이에 있던 세계여행 테마의 교육만화 책에서 였을 것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콧수염 달린 박사님과 남자애 여자애가 세트로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사건사고를 해결하고 악당들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는 내용이었는데, 여러 에피소드들 중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딱 두 가지,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 쿠겔 초콜릿과, 케밥이었다.


처음 그림으로 케밥을 보았을 때의 반응은 여느 한국인들과 다르지 않아서, 저 접시에 올려진 밥이 케'밥'인건가, 한국의 개밥이랑 어원이 같은 건가, 하고 혼자서 고민하다가 그 정체를 끝내 모른 채로 자라나게(?) 되었다.


이후로 이태원 등지에서 스쳐지나가며 접하게 된 케밥도, 저 밀전병에 싼 스타일을 케밥이라고 하는 건지 밥이랑 접시에 같이 나오는 스타일을 케밥이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5년 전 터키 여행과 이번에 터키 다리공사일을 통해서, 헷갈리던 케밥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케밥이란 그저 구운 고기(대부분)를 뜻한다는 것. 그걸 빵에 넣어 먹든, 밀전병에 싸서 먹든, 밥과 같이 접시에 담아 먹든, 그것은 모두 케밥이라고 한다.



야근과 휴일근무, 야간근무, 철야, 점심저녁시간 근무 등으로 점철되어 애초에 생각했던 '힘들게 일한 후 퇴근길에 케밥을 걸치는 삶' 따위는 꿈도 못꾸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래도 가끔씩 비는 시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열심히 먹으러 다녀서, 그래도 지금까지 은근히 다양한 케밥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내 경우에 어디를 여행을 가든 가장 먼저 익히는 그 나라의 말은 인사도 아니고 길을 묻는 것도 아니고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니라, 바로 메뉴판에 적힌 단어들과 계산을 위한 숫자들이다. 음식을 주문하고 계산하는 것에 지장이 없는 것. 이것이 내 여행에서 가장 중대한 사항이다.


이제 나름대로 터키의 식당에서는 원하는 것을 주문하고, 싫어하는 것(오이와 마요네즈)을 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그래도 명색이 케밥 먹는 노동자인데, 간만에 오늘은 그간 먹었던 케밥 특집으로 가 볼까 한다.


먼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케밥인 되네르 케밥이다. 큰 꼬치에 세로로 끼워놓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그것. 얇게 썬 고기를 차곡차곡 쌓아 큰 덩어리를 만든 다음 밖에서부터 익혀낸 다음 익은 바깥 부분만 칼로 긁듯이 썰어내며 먹는 방식이다.


통째로 한번에 구우려면 바깥은 타고 안은 덜 익을 수밖에 없을텐데, 고기 굽기 전문가인 터키인들은 이걸 세로로 세워 바깥부터 구워 낸다는 발상을 했다.


왼쪽의 크고 밝은 색깔이 닭고기(타욱)고, 오른쪽의 짙은 색이 소고기(다나 혹은 에트). 이스탄불에서 자주 먹었던 양고기(쿠주) 되네르는 이 동네에선 도통 본 적이 없다.


이렇게 긁어낸 고기를 가지고

또르띠아 같은 밀전병(라바쉬라고 하던가)에 싸서 먹으면 '뒤림 케밥'이 된다. 이곳에서는 감자튀김을 속에 넣어 뚱뚱하게 만드는 스타일이 자주 보인다. 메인도 감자튀김이 들어 있는데 감자튀김을 세트로 주다니... 옳지 않은 선택 같다. 마치 부리또 같은 느낌. 가장 대중적인 케밥의 이미지인 이 뒤림 케밥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다.


또 긁어낸 고기를 이번에는 터키의 국민빵 에크멕(뭉툭하고 조금 더 부드러운 바게트)에 넣으면

00(재료 이름) 에크멕 케밥이 된다. 예전에 터키를 여행할 때 가장 자주 접한 기본적인 스타일의 케밥이지만 어째서인지 이곳에서는 도통 찾아보기 힘들다. 기본 빵인 에크멕이 워낙 쫄깃하고 맛있어서 대체로 맛있었던 기억이다. 가끔 터키인들의 식사로도 나오는데 뺏아서 먹어봤더니 예전에 기억하든 그 맛이 아니다. 빵이 너무 크고 부담스럽다. 센스 있는 집은 에크멕을 반으로 갈라서 되네르 고기에서 흘러내리는 기름을 묻혀 화로에 안쪽을 살짝 그을려서 준다.


이스탄불에서 유명한 에밀아저씨의 발륵(생선이지만 여기선 고등어를 말한다) 에크멕도 이런 스타일.


그리고 이스켄데르 케밥.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에 나와 유명해진 이스켄데르 케밥도 결국 되네르 케밥에 속한다. 긁어낸 고기에 토마토 소스와 버터를 끼얹고 요구르트와 함께 내면 이스켄데르 케밥이 된다.


겔리볼루 코자 우스타의 이스켄데르 케밥은 어쨌든 지금껏 터키에 와서 먹었던 음식 중에 랭킹 1위다. 처음 고기를 한점 집어 먹었을 때의 그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그래 이게 케밥이지. 유일하게 앵콜 식사를 하러 들렀지만 코로나로 인해 실패했다. 귀국하기 전에 반드시 한 번 더 먹을 예정에다. 꼭.


되네르 케밥은 가장 익숙한 느낌의 케밥이지만, 저녁 6~7시만 되면(이쪽 지역에서는) 기계를 꺼버리기 때문에 휴일에 일찍 움직이지 않고서는 먹을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다. 다른 지역에서는 한밤중에 배고파서 야식겸 먹으러 가도 뱅글뱅글 잘만 돌아가고 있었는데..




되네르 케밥은 이쯤하고(더 많은 스타일이 있지만 아직 먹어보질 못했다), 다음의 분류는 이즈가라 케밥이다.


이즈가라는 되네르 기계를 쓰지 않고 그냥 일반적으로 석쇠에 구운 것을 말한다. 무엇을 굽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며, 기본적으로 곁들여 먹을 빵과 구운 고추, 구운 토마토, 밥인 필라프, 양상추, 양파와 함께 나온다.


이즈가라 메뉴 중에 일단 자주 보이는 것은 쾨프테라고 하는 터키식 미트볼-떡갈비. 고기를 다져 뭉쳐놓은 것인데 국민 음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곳곳에 '쾨프테집'이라는 이름을 걸어 놓은 가게가 많다. 터키인들이 자주 즐겨 먹는 모양이고, 우리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은 익숙한 느낌의 케밥이지만 뭔가 이녀석이 만족스러웠던 기억은 거의 없다. 대체로 퍽퍽했던 기억이고, 특색 있는 맛이 나지도 않았다. 언젠가 제대로 된 쾨프테를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함께 나온 것은 밀 볶음밥인 불구르 필라프

다음은 아다나 케밥.


일을 하다가 마주친 터키인들에게 어떤 케밥을 가장 좋아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100% 확률로 나온 대답, 아다나 케밥(사실 두 명에게 물어봤다). 표본이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뭔가 편의점에서 팔 것처럼 초라해보이는 모양의 케밥이 현지인들에게는 인기가 있나보다.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터키 동쪽의 아다나 지방에서 유래했다는 이 케밥은 다진 양고기와 양지방을 매운(사실 안 맵다) 양념을 해서 긴 핫바 모양으로 뭉쳐 쇠막대기에 꽂고 석쇠에 구운 요리다. 그런데 내가 갔던 음식점에서는 양고기냐고 물었더니 '다나(소고기)'라고 한다. 분명 인터넷에서는 양고기라고 그랬는데.. 냄새도 양고기 같은데.. 뭐 어쨌거나.


개인적으로는 양이 너무 적어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터키인들(무려 두 명이!)이 최고로 손 꼽는 케밥이라고 하니 정을 붙이기 위해 종종 주문해서 먹는 중.


+매운 양념을 빼서 빨갛지 않은 상태인 것은 우르파 케밥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양갈비인 '피르졸라'.


현지인들이 고기들 중에서 귀하게 여기는 순서는 아마도 양>소>닭 순인 것 같다. 나 또한 터키에서 맛본 양고기 케밥 맛에 반해 한국에 돌아와서도 양고기를 맛나게 먹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이곳 랍세키 근방에서는 양고기를 쉽게 찾아보기가 어렵다. 랍세키 부잣집 도련님인 사멧(취미로 공사일을 하러 온)이 랍세키에서 가장 괜찮다는 레스토랑인 아이도안 에트 로칸타스에서 간신히 찾을 수 있었던 피르졸라는 한국에서 먹던 양갈비와 큰 차이가 없는 그런 맛이었다. 적당히 부드럽게 익혔고, 양 냄새도 많이 나지 않았다. 사실 양의 맛이 좀 진하게 나길 은근히 원했지만, 그래도 함께 갔던 양고기에 익숙하지 않은 일행들이 먹기에는 더 좋았다.


익숙한 모양 때문인지 일하러 오신 반장님들이 외식을 할 때 가장 즐겨 찾는 메뉴이기도 하다. 얼마 전 회식에서도 양갈비가 나왔을 정도로.


이건 겔리볼루에서 먹었던 코코레치. 양 내장으로 만든 케밥이다. 냄새도 그렇고 비쥬얼도 그렇고 제법 위험(?)해 보이는 음식이지만 양고기 사랑으로 한번 도전해 봤다. 저렇게 구운 것을 잘게 잘라 빵에 넣어 주는데 슬라이스 해서 넣어주는 곳도 있는 모양이다.


맛은 뭐랄까, 구리구리한 냄새와 함께 무척 쓴 맛이 났는데, 코코레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면 아마도 이 집이 맛이 없었던 걸로.


익숙한 느낌의 생선 구이. 이것도 따지고 보면 케밥이다.


겔리볼루 항구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한 레스토랑에 가서 유럽 사이드의 알바생 친구들과 먹었던 메뉴다. 터키에서 생선을 먹는다는 것은 가성비를 포기하는 것. 보통 25~30리라(한화 3~4500원) 정도 하는 일반 케밥에 비해 이건 90리라(13500원)짜리로 상당히 비싼 편에 속한 식사였다. 만족도는 글쎄. 생선으로서 그냥저냥 맛있기는 했는데 야외 테라스라 그런지 금방 식어버렸다. 한국에서 온갖 맛난 생선들을 먹어온 나로서는 적어도 생선 만큼은 터키가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담백하게 구운 생선이다. 간도 좀 심심하다.



내 행복한 터키 식사를 위한 부적

식사를 할 때마다 중요한 것. '오이 넣지 마세요, 마요네즈 추가하지 마세요'를 대충 구글로 번역해서 핸드폰 대기화면으로 설정해놓았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마다 간편하게 버튼 하나로 보여줘서 실컷 시켰는데 먹지 못하는 불상사를 막아준다. 보여주기만 해도 식당의 아저씨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엄지를 쓱 올리며 타맘(오케이)! 한다. 효과는 만점. 아직까지 이걸 보여주고 그것들이 음식에 섞여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상은 지금껏 먹었던 케밥들.


6개월동안 천천히 여러 종류를 느긋하게 하나하나 찾아서 먹어보자, 라는 생각이었는데 코로나로 현장이 봉쇄되어 숙소와 공사현장만 왔다갔다해야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의 소박한 케밥 탐험에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과연 나는 '케밥 먹는 노동자'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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