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3일차]
탑정에서의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작업은 캣워크 플로어라고 해서 주탑과 주탑 사이에 사람들이 걸어다니며 작업을 할 수 있는 일종의 간이 구름다리를 만드는 공정이 반복되고 있다. 위험하고 수많은 철강 재료가 드는 큰 규모의 작업이지만 이 모든 것이 본 케이블을 설치하고 난 뒤에 철거되어야할, 말 그대로 공사만을 위해 설치하는 것들이라는 게 신기할 뿐이다.
직접 현장에서 본 공사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본래 지어야할 것들을 짓기 위해서 건설하는 더욱 거대하고 많은 것들. 그리고 공사가 끝난 후에는 신기루처럼 사라져야할 것들. 지금 내가 머물고 생활하고 작업하는 이 공간은 언젠가 이 대교가 만들어진 후에는 감쪽같이 사라져서 우리들 밖에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창문을 열고 다리 위를 쌩쌩 달리며 지나가는 차들은 저 머리 위 탑 꼭대기의 어딘가에 초록 헬멧을 쓴 노동자가 도시락을 먹곤 하던 나무 판자와 작은 의자가 있는 어떤 공간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겠지.
최근에는 터키에서 대유행중인 코로나로 인해 숙소를 대대적으로 옮겼다. 이제 정들었던 작은 마을 랍세키를 떠나 차나칼레의 호텔에서 머물게 됐다. 나름 큰 관광도시라서 기대했던 것도 잠시, 우리는 호텔이라는 명목의 거대한 수용소에 갇히게 된 신세가 되었다. 격리를 위해 만들어진 신생 호텔(?)이라고 들었는데 시설은 랍세키의 일디즈 호텔보다 깨끗해 보이지만 공사가 애매하게 끝났는지 벽이나 창문 여기저기서 석회가루 같은 것이 묻어난다. 이제 자유는 완전히 사라져서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나갈 때는 출근할 때 말고는 아예 없어졌다. 비록 시설이 좋지 않더라도 동네 근처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간식거리를 사먹곤 하던 일디즈 호텔의 소박한 생활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이곳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때문에 이제 케밥이든 나들이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그냥 출근해서 하염없이 바깥 경치와 하늘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아쉽게나마 달래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탑정에서의 일이 탑 하부에서 했던 일보다 훨씬 적고 간단하다는 것. 대기시간 없이 논스탑으로 일곱 시간 이상 씩 계속 기계를 구동하던 하부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대기하느라 보낸다.
그래서 이제 내 마인드는 그냥 출근해서 쉬자는 식으로 변했다. 출근길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이젠 출근과 퇴근 후의 시간이 거의 구분이 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가 업무와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이야기할 상대도 없이 그저 한 장소에서 무전을 기다리며 몇 시간을 혼자서 멍하니 보내는 것. 사실 이런 싸움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한때는 독방에 혼자 갇혀도 얼마든지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서울에서 최근에 자취생활을 하며 혼자 지낼때도 별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던 것 같다. 하루종일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으며, 잠들기 전 벌렁 누울 때 간이침대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듣고 아 세상에 뭔가 소리가 나고 있구나 하고 새삼 느끼던 그 때처럼.
무료함을 달래보기 위해 혼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주제 없는 강의도 허공에다가 해보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 팔굽혀펴기와 스쿼트도 해본다. 그것도 잠시, 대부분은 바람이 조금 덜 드는 구석 바닥에 쭈그려앉아서 멍하니 있는다. 무언가 구상하기 좋은 시간이지만 아직은 유익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생활의 동력이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지금은 오직 넓고 시시각각 변하는 터키의 하늘만이 가장 재미있는 볼거리다.
얼마 전 2기 알바생들이 새로 들어왔다. 같은 입장에 같은 사람들이지만 어쩐지 그들과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 만약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었다면 지금쯤 1기 알바생들처럼 친하게 지냈을 사람들인데. 단지 상황이 다른 것만으로도 마음의 거리가 쉽게 생겨버리는 것이 신기하다.
한편으로는 그간 고생을 함께 했던 1기 알바생들끼리 많이 친해졌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공항에서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서먹서먹하다는 표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이였는데. 함께 주탑의 멤버가 된 U와 Y와는 특히나 가까워졌다. 서로 각자의 자리에 있다가 밥먹는 시간이나 차이(티)타임 때, 출퇴근 시간에 종종 만나는 것이 반갑다.
끝 없는 야근과 이제 공사현장과 한참 멀어진 숙소 사정으로 인해 출퇴근 시간이 비약적으로 길어졌으므로(배와 버스가 잘못 걸리면 2~3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이렇게 일지를 쓰는 것은 꽤나 밀리게 되었다. '현재형' 시제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점점 '과거형' 시제를 쓰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심조차 할 수 없어지게 된 '과거를 말하는 방식'의 글쓰기라는 헤게모니에 대한 내 작은 도전도 위협을 받고 있다.
뭐 여담이긴 하지만, 과거를 말하는 후일담의 글쓰기 방식은 아마 리얼리즘의 산물이라고 생각이 된다. 벌어졌던 일을 전달하는 가상의 화자를 세워둔 입장에서는 과거형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리얼'할 테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설이란 허구성을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현재형 시제야말로 무척이나 소설적인 말하기 방식이 아닐까.
아마도 특정할 수 없고 존재할지도 미지수인 이 글을 읽는 당신(어쩌면 그것은 미래의 어떤 시점의 나일지도 모르겠다)에게 나의 현재를 전달하기 위하여, 이렇게 8일치 일지를 몰아서 적어버리는 나를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이미 한 달의 격차가 나버린 나의 현재를 따라잡기 위함이다. 그래야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현재형 시제가 그나마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 것만 같다.
또한 소년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써버린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