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4일차]
2주에 가까운 기간 동안 야간조 생활을 하는 중이다.
야간조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밤의 공사장은 무척이나 조용하다는 것이다.
물론 기계의 소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낮시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이것저것 참견하고 일정을 멈추고, 다른 작업 장소의 어떤 소식이 들리고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무척이나 조용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어둡고 고립된 세상에는 오로지 우리 주탑 팀 멤버들 뿐이고, 낮과는 달리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한다. 기계의 소음은 마치 귀뚜라미 소리처럼, 시끄럽지만 한편으로는 조용한 밤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모터 소리를 들으며 밤의 한가운데 라이트 너머의 어둠을 보고 있으면 시간과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휙휙 지나간다.
야간의 환경은 주간보다 훨씬 가혹해서, 추위도 바람도 차원이 다르다. 특히 해가 뜨기 전 5~7시 사이의 추위는 여섯 겹이나 겹쳐 입은 옷을 모조리 뚫고 살과 뼈에 스며든다. 거기다가 바람이 불고 비까지 오면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보기와는 달리 그나마 가장 아늑한 구석.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비를 피할 곳이 없어서 바닥의 발판 깔개를 들어 대충 천장을 만들어 비를 피해 본다. 물론 별로 효과는 없고 그저 뭔가 '없는 것보단 낫다'라는 위안감만 제공한다. 이 위안감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이다. 대각선으로 내리는 비로 실제로는 몸이 흠뻑 젖고 있으면서도, 이 더러운 발판 깔개가 뭔가 내가 젖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는 헛된 믿음이 묘하게 내 마음을 따듯하게 만든다. 그러면 절망 속에서 웃음이 나듯이, 무척이나 든든한 기분에 혼자 웃음이 나온다.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이 고립된 곳이라 다행이지, 만약 한밤중에 비바람을 맞으며 혼자 웃고 있는 나를 본다면 누구나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가끔 기상이 너무(적당히 안 좋으면 물론 일을 한다) 안 좋으면 그냥 사무실에서 대기할 때도 있다. 그럴때는 컨테이너로 지은 주탑 하부 사무실이 마치 캔자스 외딴 시골집처럼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만 같다. 그래도 비바람을 피해 (실제로)따뜻한 곳에서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있다는 점에 위안을 받는다.
종종 식사가 도착하지 않아(식사가 제 시간에 제대로 오지 않는 것은 이 탑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렇게 터키 인부들의 식사를 빼앗아(나눠) 먹을 때가 있다. 터키식 식사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밥과 스프와 메인 요리.
메인 요리는 고기류가 나올 때도 있지만 이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튜 같은 것이 나올 때가 많다. 요건 토마토인지 뭔가 덜큰한 맛이 나는 빨간 스튜에 콩(아마도 병아리콩)을 잔뜩 넣은 요리다. 터키인들은 빵을 스튜나 스프에 찍어 먹거나, 볶음밥인 필라프를 퍼서 빵 위에 올려 먹기도 한다. 빵 위에 밥이라니. 한 명의 내추럴본 동양인으로서 믿기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따라해보려고 하다가 차마 멈춘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오랑캐의 습성이다.. 머릿 속에 갑자기 없던 흥선 대원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호통을 친다.
비가 오는 어느 날의 아침 풍경처럼 보이지만, 비바람에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길의 호텔(수용소) 풍경이다. 다행히 암막 커튼이 있어서 햇빛을 어느정도 피해서 잠을 잘 수 있다. 물론 제대로 잠을 자진 못한다. 많이 자 봤자 다섯 시간, 어떨 때는 겨우 한 시간. 새벽 세시만 되면 세차게 부는 비바람 속에서도 눈이 저절로 감긴다. 물론 기계를 구동할 때는 빼고.
때로는 내 방으로 고양이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다. 야옹야옹 하는 소리가 문밖 가까이서 들리길래 슬쩍 문을 열었더니 호다닥 뛰어 들어오는 녀석. 그래 내가 비록 정신없이 피곤하긴 하지만 찾아온 너랑 잠깐은 놀아줘야 하지 않겠니.
좀 놀아줬더니 아주 방 안에 눌러 붙으려하길래 들어서 다시 강제 배웅을 해버렸다. 녀석은 한동안 밖에서 야옹야옹하다가 훌쩍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언젠가 그런 꿈을 꿨던 것 같다. 홀딱 젖은 새끼 길고양이를 데려와 씻기고 말려주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해 재워놓고는, 뭐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이제 이 녀석과 함께 살게 되는건가, 곤란함 반 두근두근 기대 반인 마음으로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다음날 아침 열린 창문으로 훌쩍 사라져버린 녀석. 텅 비어 있는 수건 위를 보면서 꿈 속에서 느꼈던 그 섭섭한 마음. 잠에서 깨고 나서도 또 한번 섭섭했던 그 느낌이 기억났다. 아, 나만 고양이 없어.
이제 여기서 일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처음에 현장을 갑작스럽게 접했을 때는 처음 들었던 것과는 다른 업무와 혹독한 환경, 살인적인 근무 시간으로 인해 당혹스럽긴 했다. 하지만 기계를 다루는 일과 무전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꽤나 할만하다는 생각이 점점 들고 있다. 뭐 어쩌면 공정에 따라서 업무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첫 한달은 7시간 넘게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계속 기계를 구동하며 무전에 반응하고 상황을 보고해야 했지만, 지금은 깔짝깔짝 기계를 틀었다가 끄면서 대부분은 멍하니 대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햇빛을 거의 보지 못하는 생활이 지속되고 있지만, 밤의 한가운데 동떨어져 있는 그 고립감이 포근하고 마음에 든다. 가혹한 비바람 속에서 조금이나마 몸을 숨길 수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는 재미 또한 묘하게 중독적이다. 야간조만의 메리트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래도 오늘도, 또 다른 오늘도 하루하루씩 버텨나갈만 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1.3배로 주는 시급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