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68일차]
2주간 이어오던 야간조 일정은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끝이 났다.
워낙 낭만이 없이 일만 시켜오던 회사라 당연히 크리스마스 따위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쉬는 건 물론이고, 메리 크리스마스 한 마디, 아니 그냥 크리스마스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어떤 징조도 물론 없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야간조의 야근을, 그러니까 아침까지 연장근무를 했고, 퇴근을 하니 26일이었다. 크리스마스의 저녁식사의 메인 반찬은 무려 시금치. 코로나로 봉쇄된 이후부터 그래도 먹을 만하던 식사는 점점 열악해지더니 크리스마스날에 정점을 찍었다. 시금치 치고는 간이 잘 되어 나름 괜찮았지만, 그래도 시금치만으로 밥을 먹기는 좀 그렇지 않나. 다른 메뉴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못 먹는 거였거나, 단무지거나 뭐 그런 식이었을 것이다. 사실 하청 회사인 여기도 원청 회사에서 식사를 받아오는 처지라, 뭔가 그 쪽에서 문제가 있었을거라 생각이 된다.
원래 한국에서도 기념일을 잘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니, 그래 뭐 이슬람 국가라 크리스마스가 없다고 생각하기로 한다.초록색 시금치를 봤으니, 뭐 크리스마스 트리를 본 셈으로 쳐야지.
야간조에서 주간조로 바뀌기 전, 26일에 휴일을 받았다. 이제 다시 햇빛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이 시려오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야간 작업의 조용함, 조금 여유로운 업무와 평화로운 분위기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날씨가 가혹한 날도 많았지만 그 덕에 거기서 살아남는(?) 재미도 더욱 컸다. 다행히 반장님들께서 알바생들 추워 보인다며 인부들과 뚝딱뚝딱해서 기계 조종석 근처에 파란색 바람막이를 쳐주셨다. 앉아 있을 의자도 하나 생기니 몹시 든든하다.
잠은 마지막까지 적응하지 못한 것 같다. 세시만 되면 졸지는 않더라도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야간으로 근무시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매일 같이 철야를 했던 느낌. 야간에서 주간으로 삶의 패턴을 바꾸는 건 그냥 하루만에 됐다. 푹 자고 났더니 아침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지나고, 크리스마스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백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기는 힘들 것이다.
내 경우에 기억나는 크리스마스는 두 번이 있다.
한 번은 아주 어릴 적의 일이다. 어렸을 적에도 시니컬한 시기가 있었던지, 학교(아마도 초등학교 였던 걸로 기억한다)를 마치고 문방구를 지나며 보이는 각종 크리스마스 상품들과 트리들을 보면서 흥, 저까짓게 뭐라고, 저런 걸 사봤자 아무런 감흥이 없어, 라고 생각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스쳐지나갔던 것 같다. 실제로 무언가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굳이 온갖 상품들로 분위기를 만들어가며 뭔가 특별한 날인 것처럼 속이는 행위들. 그러면서도 아파트로 올라가던 오르막길에 귀에 맴돌던 캐롤 만큼은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캐롤이 활짝 펼치면 어딘가에 달린 작은 음악통에서 울려퍼지던 (비싼)크리스마스 카드는 좀 갖고 싶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 캐롤이 울리던 크리스마스 카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문방구에서 파는걸 한번 열어 본 건지, 결국은 하나 쯤 사거나 누군가에게 받아서 알고 있는 건지, 그걸 가진 어떤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한번 열어 보고 감탄을 했던 건지. 그리고 그 캐롤이 무슨 곡이었는지도. 콧방귀를 끼며 지나갔던 내 조그맣고 시니컬한 그 시절의 쿨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캐롤이 울리는 크리스마스 카드의 이미지는 내게 유일한 크리스마스의 원풍경이 되어 기억 속에 지금도 남아 있다.
나머지 한 번은 뭐 특별한 것은 아닌데, 대학 시절에 애인이 없고 외로운 사람들끼리 동아리 방에 모여 조촐하게 와인 파티를 하기로 했었다. 오늘 고백할 거라고 파티는 선배님들끼리 하라고 아침에 당차게 파티 초대를 거절했던 후배가, 한참이 지난 저녁에 불 꺼놓고 전구만 반짝거리는 어두운 동아리 방에 풀죽은 표정과 한 손에는 꽃다발을 바닥을 향해 들고 터벅터벅 들어오는 그 장면...인데 이런 게 왜 기억에 나는지는 모르겠다.
추억은 그 순간을 한창 지나고 있을 때는 그것이 추억으로 남을 만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항상 추억이 될 정도로 가치있지 않은 것들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기억 속 어딘가에 박혀서 새삼스레 발견되곤 한다. 그걸 의식하고 난 뒤부터 종종 특별할 것 없는 어떤 순간들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한다. 어떤 미래의 내가 이 순간의 나를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어쨌든 언젠가 먼 훗날에 크리스마스날에 왠지 시금치가 땡겨서 먹고 있다면, 그것은 그래도 이런 날도 크리스마스였다고, 내 몸이 이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는 좀 늦기는 했지만,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