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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Feb 13. 2021

앵커리지의 밤

[99~103일차]


앵커리지에 밤이 찾아왔습니다. 야간조들은 고개를 드세요.


이제 (어쨌든)어엿한 아시아 앵커리지의 일원이 된 나는 알바생 G와 함께 야간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탑정의 야간조와 앵커리지의 야간조는 조금은 달랐다. 좁은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밤과 새벽의 추위를 나누며 버티던 곳이 탑정이라면, 앵커리지는 육중하고 텅 빈 콘크리트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버려진 채로 일을 찾아 헤매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 달랐다.


비록 탑정보다 실제의 온도는 따뜻했지만, 어딘지 텅 비어서 더욱 추운 느낌. 서로 한 배를 타고 출퇴근하며 좁은 공간에서 함께 밥을 나눠 먹는 탑정의 사람들과는 달리 앵커리지는 작업자들끼리도 뭔가 데면데면하게 거리감이 느껴진다. 여전히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반장님들은 없고, 이곳에서 말을 나눌 만한 상대는 알바생 G와 드라이브 윈치 팀인 터키 인부 네 명 뿐.



최근 들어 좀 따듯한 날씨였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기온이 뚝 떨어진다. 일기예보에도 새벽 2시를 기점으로 12도에서 영하 1로 바뀐다고 나와있길래 뭔가 잘못 표기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새벽 두시가 되자마자 갑자기 공기가 냉랭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이었는데 피부에 닿는 공기가 순간 날카롭게 변해서 깜짝 놀란다.


공허하고 넓고 춥고 밝고 어두운 앵커리지의 밤.


밤이라도 동굴에서 부는 리코더 연주는 포기할 수 없다. 동굴에 비치는 내 그림자가 음산하게 보이긴 해도 이 소박한 취미생활은 잠시나마 어둠과 추위와 피로에 지친 마음을 풀어준다.


연주하는 것은 주로 관악부 동아리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며 기억에 남겨 둔 마음에 들었던 멜로디들이다. 피콜로의 솔로, 알토 색소폰의 솔로, 트롬본의 솔로, 플루트의 솔로. 그런 것들을 불고 나면 다음은 여러 OST들. 해리포터, 캐리비안의 해적,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히사이시 조의 음악들은 하나같이 리코더로 불기 좋다), 반지의 제왕, 레미제라블. 다음은 디즈니의 곡들. 최신 3D 디즈니 작품들부터 아주 오래된 클래식한 디즈니까지(역시 마지막은 When you wish upon a star).


이렇게 해서 레파토리가 떨어지면 추억의 만화 주제가로 넘어간다.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에 교실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중, 어디선가 굉장히 익숙하게 듣던 멜로디가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개구리 왕눈이라는 만화에서 왕눈이가 핍박 받고 슬플 때 혼자서 불던 그 피리소리였다. 나는 학교에서 수업용으로 쓰던 그 플라스틱 리코더에서 그 멜로디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고, 그날 바로 집에 들어와 리코더로 하루종일 그 멜로디를 찾아 리코더를 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툰 솜씨로 그 왕눈이의 피리 멜로디를 불 수 있었다. 아마 그것이 내 악기 생활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날 누가 교실에서 불었던 그 리코더 연주가 없었다면, 관악부 동아리 지인에게서 소개를 받았던 이 터키행 알바도 없었을 것이다. 상상해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나비효과. 그럼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어떤 날은 배를 타고 G와 함께 탑정에도 출근한다. 앵커리지와 연동 작업을 하기 위해 탑정에서 윈치 기계를 잡아야 하는 날. 오랜만에 돌아온 탑정에는 알바생 U가 있다. 지독한 탑정의 추위에 버티면서 우리는 점점 미쳐간다. 바람과 추위에 맞서기 위해 군가도 부르고 옛날 추억이 만화 노래도 부른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뇌 한구석에 박혀 있던 그 어린 날의 노래들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아련한 추억들을 공유한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차려주던 밥을 기다리면서 보았던 그 만화들. 내 경우에는 맞벌이하는 부모님(보통 밤 열 시에 들어오셨다)을 기다리며 무서움을 잊기 위해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보았던 만화들(항상 만화를 틀어주는 투니버스라는 채널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것들을 떠올리다보니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춥고 힘들지만 재미난 시간들.


야간조의 식사는 저녁으로 먹었던 메뉴가 그대로 온다. 만약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면 이렇게 터키인 식당으로 가서 터키 식사를 하나 얻어 먹는다. 공사 현장 봉쇄 때문에 벌써 몇 달째 밖으로 못 나가고 있는 요즘 해외여행을 하는 기분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체험이다. 그래, 누가 외국 공사현장 식사를 먹어보겠어. 그들의 식사는 종종 맛있다. 큼지막한(그리고 느끼한) 닭다리가 나온 날. 엄청나게 크고 투명하게 잘 구워진 고추도 맛난다. 스프인 초르바는 언제나 복불복. 토마토 베이스면 보통 만족할 수 있다. 콩 베이스면 음... 별로.


그렇게 앵커리지 야간조의 하루하루가 간다.


이제 100일. 이 알바의 엔딩이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과연 이 일을 마치게 되는 날,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직은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여전한 모습일까. 사람들은 아마도 어딘가 날 보고 달라졌다고 할 것 같다. 실제로 달라졌는지와는 별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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