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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Feb 08. 2021

터키의 강아지들

[96~98일차]


바람이 세차게 불고, 그동안 밀렸던 휴일을 연달아 쉰다. 야간조로 들어가기 전 교대를 위해 반나절의 수면 조절 시간이 주어지므로,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꽤 긴 시간을 연달아 쉬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로 인한 공사 현장 봉쇄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숙소에 갇혀 지낼 뿐인 의미 없는 휴일이다. 시간이 빈 김에 그동안 터키에서 만났던 강아지(귀여우면 다 강아지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 한다.


원래 열성 고양이파인 나는 개들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내가 나서서 안달하게 만드는 고양이들의 묘한 매력에 비해, 간단한 밀당도 없이 언제나 일방적으로 좋다며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개들은 뭔가 매력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본가에서 기르는 개인 비야. 개들은 바로 저 부분이 귀엽다.


그러나 본가에서 개를 기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개들만이 가진 매력을 알게 되었다. 녀석들은 막무가내로 착하고, 웃기고, 아련하다. 나를 보면 항상 좋다고 헥헥거리며 올라가 있는 까만 입꼬리를 보면, 나도 입꼬리가 함께 올라간다.


터키의 개들은 느긋하고 아련하고 착하다.


정부 차원에서 떠돌이개를 관리하는 터키에서는(관리하는 개의 귀에는 표식이 달려 있다) 사람 무릎보다 큰 중대형 개들이 도시에서 사람들과 섞여 지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크기가 대체로 크고 종종 생긴 것도 무서운 녀석들도 있는데 목줄도 없이 몇 마리가 몰려서 사람이 다니는 길을 자유롭게 성큼성큼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 조금 무서운 생각도 들지만, 그런 걱정이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이곳의 개들은 하나같이 온순하다.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안겨들지도 않고, 그저 제 갈길을 다니다가 배가 고프거나 놀아주기를 원하면 슬금슬금 근처(사람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매너 있는 거리)로 와서 턱 앉아서 슬픈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을 내밀어 만져주면 눈을 지긋이 감고 머리를 내밀며 그 손길을 즐기고, 먹을 걸 주면 당연하다는 듯이 느긋하게 그걸 음미하며 먹는다. 이쪽에서 관심을 주지 않으면 그 거리를 유지하다가 슬그머니 가버린다.


공사현장에는 개들이 깃든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이 법칙은 터키도 예외가 아니라서, 이곳에는 나름 많은 개들이 저마다의 구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간 이리저리 지나며 인연을 쌓아왔던 개들을 하나씩 소개해보겠다.



1. 귤레귤레

공사장에 처음 왔을 때, 입구에서 잠깐 봤던 개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보았던 까만 개. 사람의 손길이 좋은지 머리를 쓰다듬으면 자기 쪽에서 머리를 들이미는 힘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쓰다듬는 시간이 길어지면 무척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더 해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사람의 손길이 닿는 동안 먼저 움직이는 법이 없는, 이곳에서 가장 순한 아이.


이름이 귤레귤레(bye bye)인 이유는 이 녀석을 만날 당시에 우리가 아는 터키어가 귤레귤레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어디로 갔는지 잘 보이지 않는 녀석. 귤레귤레..



2. 차우차우

식당과 사무실 앞에 있어서, 이곳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녀석. 식당 앞이라는 꿀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근방에서 서열이 가장 높다는 말이다.


차우차우라는 이름은 그냥 생긴 걸 보자마자 바로 붙여진 이름이다. 머리와 상체도 크고 털도 북실북실해서 엄청나게 터프하게 생긴 이 녀석은 사람에게만큼은 무척 온순하다. 가죽이 두껍고 털이 푸근해서 만지는 맛이 일품인 녀석. 아무리 만지고 귀찮게 해도 뭔가 허탈한 그 표정을 유지하며 가만히 있는다. 다만 먼저 사람에게 다가오거나 머리를 들이미는 경우는 없다. 대로변에 털썩 누워서 사자처럼 하루종일 자는게 일상이다.


사람에게는 순하지만 다른 동물들에게는 깡패. 특히 고양이(그중에서도 창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으면 자기가 먹던 밥도 버려두고 와서 고양이밥을 빼앗아 먹는다. 그걸 몸으로 막으며 식사하는 고양이를 보호하는 터키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터키인들은 개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지). 사람들이 녀석을 혼내도 차우차우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다. 마이페이스가 가장 강한 녀석.



3. 점박이

갈색 얼룩무늬가 눈에 띄는 녀석.


앵커리지로 가는 길에 출몰하는 이 녀석의 주특기는 배를 보이며 드러눕는 것이다. 사람을 보기만 하면 벌렁 벌렁 배를 보이고 뒹굴어서, 녀석을 그냥 지나치기는 쉽지 않다. 오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배를 긁어주고 간다.


다른 특징은 없다. 먹을 걸 준 기억도 없고. 이 녀석이 뭔가 다른 행동을 하는 걸 본 적도 없다. 그냥 배만 열심히 뒤집을 뿐. 정말 그 기억밖에 없네..



4. 사모예드

하얀 녀석.


그러나 그 때문인지 항상 꾸질꾸질한 녀석. 공사장의 구정물들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아이라 안타까울 때가 많다.


녀석이 진짜 사모예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


귀가 무척 짧은 게 특징인 이녀석은 차우차우 못지 않게 덩치가 크다. 은근히 출몰하는 빈도가 적고, 손을 타기는 하지만 사람과 그리 교류가 없어서 좀 신비주의적인 측면이 있는 녀석이다. 어디 가서 주눅든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이 녀석도 서열이 나름대로 높은 것 같다.


차우차우의 숨겨둔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다. 누군가 야심한 밤에 둘이서 공개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5. 겁쟁이(?)

근무하고 있는 앵커리지에 주로 출현하는 녀석.


이 녀석의 특징은 무언가에 주눅이 들었는지 언제나 꼬리를 아래로 말아 숨기고 다닌다는 것인데,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플 정도로 뭔가에 겁을 먹고 있다.


그런데 겁을 먹은 주제에 겁도 없이 위험한 공사 현장에 들락거리고,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온다. 덕분에 터키인들에게, 특히나 개혐오자인 제밀 아비에게 맨날 잔소리(뛕!)와 발길질(시늉)을 받으며 쫓겨나는 게 일상. 터키의 개들이 온순한 이유는 개들을 대하는 터키인들이 상냥해서라고, 누가 말했던가. 앵커리지에서 이 녀석을 좋아하는 터키인은 별로 없다. 다가오면 피하고, 천막 비닐에 앉아 자고 있으면 비닐 째로 던져지고(인부들이 비키라고 손짓을 해도 말똥말똥 가만히 이쪽을 보기만 한다). 수난을 많이 겪는 녀석. 그러면서도 자꾸 다가오는 걸 보면 나름 용감한 것 같기도 하고?


불쌍해보여서 나라도 녀석을 귀여워해준다. 녀석도 이곳에서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인 줄 알고, 기계를 구동하고 있으면 어느새 내게로 다가와 옆에서 잠을 자곤 한다. 와이어가 돌아가는 위험한 현장이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은 쫓아내는 게 맞긴 한데.. 아래로 말린 꼬리와 눈치를 보는(개들은 눈치를 보면 흰자위가 드러난다) 불쌍한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럴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


뭐 오늘만 재우는 걸로.




+ 고양이

뭔가 용감해 보이게 찍힌 사진


창고양이들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창고에 못 보던 하얀 얼룩 고양이가 언젠가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청년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티가 나는 창고양이들에 비해 이 녀석은 아직 분명한 애기다. 사람을 잘 따르는 듯 하면서도, 또 어떨 땐 사람을 피해다닌다. 주로 창고의 사무책상 아래에 마련해 둔 작은 집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창고양이들과 잘 지내고 있나 싶어서, 잡아서 안은 다음 창고양이한테 인사를 시켰더니 바로 가혹하게 냥냥펀치로 얻어맞는다. 아.. 너희들 아직 안 친하구나. 미안.


상황을 보니 창고양이들 입장에선 반갑지 않은 군식구가 늘어난 것 같은 눈치다. 나이도 어린 것이 과연 이 집안에서 눈칫밥을 잘 먹으며 살아갈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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