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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Feb 16. 2021

무언가 지쳐가는 생활

[104~109일차]


요즘은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 많이 자 봤자 하루에 5시간 정도. 보통은 1~2시간.


-2주 간격으로 계속 바뀌는 주-야간조로 인한 생활패턴의 붕괴.

-바람이 불어야만 쉴 수 있는 불규칙한 휴일.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코로나로 인한 현장 봉쇄.

-'정상적인' 날이라면 무조건 연장 근무.

-사람들과 익숙해지면 자꾸만 바뀌는 내 근무지.


일에 좀 익숙해지고 아, 이 정도면 할만하다, 라고 생각이 들 무렵이면 악조건이 스멀스멀 하나씩 더 추가된다. 하나씩 하나씩 늘어나며 내 몸을 무겁게 만드는 조건들. 봉쇄 때문에 여가도 여행도 없는 일정 속에서 삶이 점점 피폐해진다. 빈틈이 도무지 나지 않는 상황에서, 다가오는 메마른 내일을 조금이라도 미루기 위해 잠을 깎아 낸다.


그렇게 깎아낸 잠으로 만들어낸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뭔가 할 수 있는 체력이나 정신(거의 비몽사몽 상태다)이 없어서 그저 유튜브의 인공지능을 따라가며 이것저것 보기만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샌가 나는 핸드폰을 침대에 떨어뜨리고 잠들어 있다. 그렇게 깜빡 졸다가 정신이 들면 언제인지 모를 한낮, 불 켜진 방. 시계를 보면 허무할까봐, 일부러 시간을 확인하지 않은 채로 불을 끄고 다시 잠을 청한다. 운이 나쁘면 한낮의 햇빛에 다시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시간을 보내게 될 때도 있다. 그러면 저녁 여섯 시까지 그렇게 있다가 버스를 타고 야간조 출근을 한다.


약속의 새벽 세 시가 되면 어김없이 잠이 쏟아진다. 영하의 날씨에 찬바람이 몰아쳐도 눈이 저절로 감긴다. 기계를 구동할 때는 물론 졸지 않지만, 가만히 무전을 기다리며 기계 앞에 대기하고 있으면 까슬까슬한 눈을 잠깐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자꾸만 눈을 감게 된다. 다행히 함께 일하는 G가 있어서, 일이 적을 때는 서로 교대를 해가며 체력을 보충한다. 교대 후 잠깐의 휴식시간이 주어지면 얼른 휴게실로 들어가서 히터 앞에서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선잠을 잔다. 그러고 나면 퇴근 시간인 아침 여덟시가 된다.



처음 이곳에 올 때 기대했던 어떤 장면이 있다.


마을의 어느 한 허름한(그러나 분위기와 경치가 좋은) 숙소에 거처를 잡고, 그곳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창가 자리를 하나 마련한 다음 퇴근하거나 휴일이면 따뜻한 지중해의 햇빛을 받으며 느긋하게 소설을 쓰는 나의 모습. 창문을 감싸고 얽힌 담쟁이 덩굴은 싱그럽고, 창문틀에 놓인 화분엔 이름표 같은 것도 하나 달려 있고. 아무리 일이 힘들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느긋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겠지. 인터넷도 핸드폰도 하지 않고 오롯이 낯선 곳의 햇빛으로 듬뿍 광합성을 하다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느긋한 작품이 나오려나. 그러다가 문득 배가 고프면 그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케밥집을 향해서 들뜬 발걸음을 옮기고.


그런 시간이 존재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봉쇄(터키에서는 이걸 '카란티나'라고 부른다)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은 일, 그러나 생각보다 힘든 일정, 그리고 공허한 숙소 휴일.


생각보다 많이 나온 돈(물론 '생각보다는'이라는 의미)으로 만족해야 하려나. 이곳에 올 때부터 가졌던, 돈을 벌려고 온 게 아니다, 라는 마음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자꾸만 사라지는 여가생활과 터키여행, 그리고 자꾸만 손에 쥐어주는 오버타임 페이. 아니야,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딱 이 반대라고.


컨테이너 휴게소가 빗물의 무게로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이 비가 엄청나게 많이 쏟아진 날,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식당에서 혼자 대기를 하면서 뭔가 공허하다는 생각을 한다. 원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카테고리가 그래도 '케밥을 먹는 노동자'인데, 최소한 '케밥'만이라도 좀 먹을 수 있다면, 이라는 바람도 이젠 없다. '낙'이 없다는 것은 마음을 무척이나 메마르게 만들어 버린다.


비가 그치고, 오늘은 터키식 식사를 하기로 마음먹고는 앵커리지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차우차우를 만난다. 녀석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고 아무 물이나 마신다. 거칠게 내리던 비에 사람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공사장엔 나와 차우차우 둘만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새삼스레 공사장을 한번 둘러본다. 처음 와서 무척이나 낯설고 긴장되던 이곳이, 이제 익숙함과 지루함으로 가득 차있다는 걸 느끼고 놀란다. 언제나 걷던 길, 언제나 보던 개, 언제나 보는 사람들.


그러다 나를 올려다보는 차우차우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 넌 내 예정에 없었지.


저마다 개성이 강한 개와 고양이들도, 탑정에서 내가 찬바람을 조금이나마 피하기 위해 찾아낸 보금자리도, 유쾌한 알바생 친구들도, 터키인 친구들도(해외 여행에서 현지인들과 말을 섞은 건 내겐 거의 없던 경험이다), 몸을 데워주던 차이도. 일을 하다가 생긴 크고 작은 사건들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기대하는 발걸음'이라고 했던가. 기대했던 어떤 풍경은 없었지만, 상상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경험이 내게는 주어졌다. 그래, 어쩌면 기대했던 그대로 주어졌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갇혀 지낸 생활도 어쩌면 추억이 되리라. 가끔 사람들과 함께하던 군대의 별로 푹신하진 않았던 이층 침대가 생각나듯이.


차우차우를 스쳐 지나 다시 터키 식당을 향한다.


그리고 식당에서 반가운 메뉴를 만난다.


여행을 오면 꼭 먹고 싶었던 해외의 파스타. 비록 알덴테고 뭐고 따지지 못할 정도로 푹 익어버렸고, 뭔지도 잘 모를 애매한 맛을 가진 소스의 펜네 파스타였지만 반갑게 잘 먹어치운다. '이것이 노동자의 식사인가.'라는 의미 부여를 혼자 열심히 머릿속으로 해가면서.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앵커리지로 걸어가고 있던 우리 드라이브 윈치 팀을 만난다. 까불이 사멧이 먼저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인사를 하고(수스쿤~!), 어딘지 조지 클루니를 닮은 것 같은 쥬루프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터키식 손인사(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자세로 왼쪽 가슴을 두번 탁탁 치는)를 하고, 어딘지 디즈니의 구피를 닮은 것 같은 메멧도 싱겁게 이이 약샴라르(밤인사) 인사를 하고, 장난기 많은 제밀 아저씨는 휴가를 가고 없고.


스무살짜리 사멧은 요즘 내게 핸드폰 피아노를 배운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인 '위스퀴다르 기데리켄(터키 민요)'의 계이름과 치는 법을 알려줬더니 하루종일 쉬는 시간이면 그것만 연습하고 있다. 머리가 영리한 친구라, 도레미파솔라시도만 간신히 아는 수준인 것 같은데도 #이 몇 개 섞인 계이름을 어떻게 어떻게 외워서 모두 연주하는 데 성공한다. 까불거리고 투덜거리면서도 일은 또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특이한 친구다.


비록 담쟁이 덩굴 달린 창문과 따스한 햇빛이 드는 책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돌이켜보면 예상치 못했던 이런 풍경들이 지금도 하나하나 추억으로 저장되고 있다. 그래, 어떻게 보면 적어도 처음 생각만큼 '공허'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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