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11일차]
현수교의 메인 케이블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그냥 크고 무거운 쇠줄 하나를 힘겹게 끌어올려서 매달면 되려나.
긴 다리를 단단히 붙잡아 지탱하려면, 그 줄의 무게나 두께는 어느정도로 굵으면 될까. 사람의 몸통 정도? 드럼통 정도? 아니면 그것 보다 더 굵게?
막연하게 가졌던 궁금증이 메인케이블 공정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풀린다.
PPWS공법이라는 기술으로 이루어지는 메인케이블 공정은 규모나 긴장감이 이전의 공정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의 작업은 이제 손가락 정도 굵기의 와이어를 100개가 넘게 뭉쳐 놓은 이 '스트랜드'라는 철사줄덩어리를 앵커리지부터 시작해서 탑 두개를 거쳐 반대편 앵커리지까지 운반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남은 2개월 정도의 기간동안 우리는 이것만 하게 될 것이다(아마 다 끝나기 전에 우리의 계약이 끝날 것이다). 더 이상의 근무지 변경은 없다. 마지막 업무이며, 이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알바생들 중 몇 명이 아시아 앵커리지에 소속되어 컨트롤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중앙통제실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컨테이너 박스에서는 이제 두 대의 드라이브 윈치 기계를 한 사람이 구동할 수 있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덕분에 세심한 주의사항이나 이전보다 복잡한 컨트롤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건 물론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기계 구동 시간도 길어서 거의 10시간 가까이 연속적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 확연히 늘어난 업무 강도와 어려운 난이도. 그래, 적응하려고 하면 뭔가 더 생기고 조건이 안 좋아지는 것이 이곳의 습성이었지.
굳이 좋은 점을 하나 생각해보자면 이제부터 '실내 근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나는 언젠가 겔리볼루의 광장에서 어떤 사무실의 불빛을 바라보며, 사무직이 아니라 찬 바람 부는 야외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내 모습을 돌아본 적이 있었다. 비바람과 눈을 맞으며, 추위와 싸우며 일을 해야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어째서일까, 그 때의 바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갑지 않은 기분이 드는 것은.
새롭게 들어온 이 컨트롤룸에는 환풍기도, 히터도, 나름 푹신한 의자도 있다. 탑정의 굴뚝에서 나오는 매캐한 용접 매연도 없고, 윈치 기계의 요란스러운 모터의 소음도 없다. 아무리 매섭고 찬 바람이 불어도 이곳은 아늑하고 따뜻한 공기 때문에 잠이 올 지경이다(물론 이건 또 다른 의미로 위기이지만).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찬바람 부는 날 바람을 피하기 위해 그나마 안전한 자리를 찾아 헤매던 재미를. 궂은 날씨에 대해 투덜거릴 때 옆에서 함께 욕해주던 터키인 친구들을(이제 막 친해졌는데). 그들과 구석진 자리에서 웅크리고 앉아 바람을 맞으며 차가워진 각자의(터키식과 한식) 도시락을 우걱우걱 먹던 식사시간을. 시끄러운 기계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해 마음껏 부르던 내 노랫소리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야외 현장에 적응해 있었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지만 때로는 황홀하게 아름답던 하늘을 보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 사람들의 메아리를 들으며 부산스러운 긴장감을 즐기기도 하고.
이제 그런 것들은 없다. 조용히 깜빡이는 모니터화면과 수많은 CCTV화면, 부드럽게 들리는 팬소리. 나는 이런 쾌적함이 반갑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놀란다. 어쩌면 그냥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걸 싫어하는 걸지도.
메인케이블을 구성하는 ppws줄을 날리는 첫 임무는 어찌어찌하다보니 내게 주어졌다. 아무도 없는 컨트롤룸에서(중간까지는 관리자가 있긴 했지만) 조용히 무전을 받으며 홀로 일지(이 작업에서는 모든 무전내용과 정보를 일지에 하나하나 다 적어넣어야 한다)를 작성하며 무척이나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모니터의 바람개비 그림이 돌아가지만, 정말로 기계가 돌아가고 있다는 실감은 잘 들지 않는다. 얼마전까지 농담과 장난을 주고 받던 터키인 친구들은 이제 CCTV 너머로 작게 보일 뿐이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지만, 그들은 내 모습을 볼 수 없겠지.
쓸쓸한 밤을 보내고 주간조와 교대를 한다. 첫 ppws는 무사히 보내졌다. 100여개의 철사줄이 뭉쳐진 하나의 ppws줄. 이것을 몇 개나 보내야 하느냐고?
한쪽만 자그마치 144개. 이걸 144개를 보내야 진짜 메인케이블이 하나 완성되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그 굵기를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몇십 년이 지나도 튼튼하겠지.
다음날에 앵커리지에 갔더니 주간조의 저녁때부터 시작되었던 양고기 파티가 한창이다. 큰 일을 막 시작해서 그런건지, 오늘 방문했다는 터키의 무슨무슨 장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2개월동안 바깥 구경도 못해보던 차에 고기파티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터키인들끼리 하는 파티지만 물론 엉덩이를 들이밀고 한 자리 잡는다. 절대 놓칠 수 없지.
당장 고기를 내놓으라고 했더니 질릴 만큼 쌓아준다. 어느 부위인지 모르겠지만 양고기는 양고기다. 뼈도 없는 살코기에 지방이 배율 좋게 잘 붙어있다. 양의 삼겹살 정도 되려나. 기름이 줄줄 흐르는 커다란 고기덩이를 베어 물었더니, 걱정과는 다르게 그 두꺼운 고기가 끝까지 부드럽게 잘린다. 그러면서 터져나와 흙바닥까지 줄줄 흐르는 육즙. 상황이 상황인 것을 고려하더라도, 살면서 먹었던 양고기 중에서 탑클래스다. 아쉬운 건 업무 시작 시간 때문에 겨우 두 조각 밖에 먹지 못했다는 것. 그래도 딱 좋다. 더 먹었으면 느끼했을지도. 원래 식사로는 잘게 자른 소고기 스테이크가 나왔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주위가 뿌연게 양고기 파티에서 나온 연기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쩐지 사라지지 않는다 싶었더니 거의 스모그급의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도 작업은 계속 된다.
이날은 야외에서 작업을 한다. 안개에 몸과 폐가 서서이 젖어가는 느낌이 들지만 그런 느낌이 무척이나 반갑다. 다시 만난 터키 친구들도 반갑고. 컨트롤룸에 입성하긴 했지만 이렇게 종종 바깥으로 나올 일이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안도라니? 참 묘하고 이상한 심리다.
옆에 놀러온 앵커리지의 개. 너도 틀림없이 오늘 포식했겠지.
모든 걸 가려주는 어둠과 안개에서 알 수 없는 포근함을 느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창문 안 따뜻한 방 난로 앞의 한 소녀도 창밖의 성냥팔이 소녀를 동경했을 수도 있다고. 그녀가 소중하게 하나하나 불을 붙이던 찰나의 성냥불은, 분명 무척이나 매혹적인 빛이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