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수아이 Feb 28. 2021

터키에서의 설날

[116~119일차]



터키에서의 설날 아침이 밝았다.


항상 멋진 하늘이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돋보이는 날들이 종종 있다. 항상 살면서 언젠가 오로라를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이 정도면 거의 오로라라고 할 수 있는 수준 아닌가. 오늘만큼은 발 밑을 조심하지 않은 채로, 앵커리지까지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 보면서 걷는다.


설날을 맞아 다시 주간조로 복귀했다. 날은 어느새 무척이나 차가워져 있다. 이번 야간조 일정에서도 역시 낮밤의 페이스를 제대로 바꾸지는 못 했다. 피로가 무척이나 축적되어 있다. 어쨌든 주간으로 복귀했으니 꿈 꾸는 듯이 몽롱하고 어두운 야간 업무에서 벗어나, 다시 태양 아래서 일하는 세계에 적응할 때다.


물론, 설날이라고 휴일은 없다. 출근해서 처음 들은 것은 덕담보다는 잔소리다. 최근 컨트롤룸으로 들어간 우리 윈치수 알바생들이 컨트롤룸에 박혀서 나오질 않는다며, 윈치 기계를 구동하는 일이 없을 때는 숨어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와서 노가다 일을 도와야 한다고 팀장님은 말한다. '저때 사고난 것(S형이 당했던) 보셨죠, 윈치수들 아무것도 모릅니다. 윈치수들한테는 윈치 일만 시키세요. 아무것도 시키지 마세요.'라고 말했다는 주탑의 관리자와는 180도 다른 주문. 앵커리지에서 사고가 난 걸 이유로 주탑에서는 알바생들에게 노가다 관련된 일을 시키지 말라고 반장님들께 주문을 했다는데, 정작 그 사고가 일어났던 앵커리지에서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노가다 업무를 더 시키려고 한다. 그래, 앵커리지로 팔려온 내 죄일 뿐이다. 주탑에서 한 달 정도 멍하니 하늘을 보며 여유롭게 대기하던 한가로운 시절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 일도 참 할만 하구나, 라고 잠깐 느꼈었지.


일을 준비하고 있으려니, 사장님이 사람들을 모으라고 했다고, 모두 앵커리지 창고 앞으로 모이라는 전달을 받는다. 평소에 거의 얼굴을 볼 일이 없는 사장님의 호출에 알바생 G는 혹시 새해 인사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하는 추측을 한다. 그래, 그게 맞는 생각이지, 일반적으로는. 그러나 나는 이곳의 습성을 잘 알고 있다. 좋은 예상은 항상 빗나가고, 불길한 예감은 귀신 같이 맞는다. 나는 새해 인사가 아닐 거라고 G에게 말한다. 어림 없지. 좋은 일로 부르는 건 아닐 거야.


그리고 내 예상은 들어맞는다.


처음 반장님들과 작업자들 앞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장님은 최근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작업이 지체되는 일과 사건 사고들)로 인해 원청회사의 신뢰를 잃었다는 말을 들었다며, 반장님들이 조금 더 신경써서 작업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 베테랑이기에 그럴 수 있지만, 독단적인 판단으로 일을 진행시키지 말고 관리자에게 물어가며 일을 진행하라고. 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터덜터덜 일을 하러 복귀한다. 설날이라고 특별한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라도 좀 나쁘지 않았으면 했는데. 메리 크리스마스가 없었듯이,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도 없는 이곳.


다행인지 바람이라도 많이 불어서 작업은 진행되지 않는다. 출근은 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어 이리저리 청소라도 하며 소일거리를 한다.


일단 하기로 한 것은 줄이 지나는 곳에 낀 때를 제거하는 작업. 누구는 고무라고도 하고, 내가 보기에는 그리스의 기름 때 같은데, 어쨌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덩어리다. 살짝 녹은 지우개 정도의 점도를 가졌고, 도구를 써서 파내자니 싸구려 뷔페의 본젤라또 아이스크림 정도의 접착력으로 단단히 붙어 있다. 어쨌든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도구를 마련해서 열심히 때를 제거한다.


워낙에 할 게 없는 날이라 아무도 우릴 신경쓰지 않고 있다. 이제 작업은 빼낸 검은 때 덩어리를 주물럭거려서 뭔가를 만드는 것으로 바뀐다. 뭘 만들어볼까, 하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터키 디저트인 바클라바를 한번 만들어 본다. 그러고보니 바클라바 먹은 지도 오래 되었지.


좀 닮았나?


터키 애들한테 보여주니 입 가까이 가져가 먹는 시늉도 해주고 열심히 리액션을 해준다. 여기저기 자랑을 하다가 흥미를 잃고 대충 윈치 기계 근처에 놔 둔다. 언젠가는 누가 치워버리겠지.


기왕 먹을 게 생각난 김에 G와 한국에서 먹던 음식 이야기를 나눈다. 치즈 닭갈비, 라면, 삼겹살, 젓가락 가득 들어올리는 짜장면 곱배기, 주황빛이 도는 국물의 비싸고 부드러운 짬뽕. 뭐 G를 약올리려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사실 딱히 그 음식들이 그립지는 않다. 거의 4개월이나 한국을 떠나 있는 지금도.


그저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빨리 이곳을 뛰쳐 나가서 케밥을 먹는 거다. 내 노동 일기 만큼이나 중요한 케밥 여행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코로나로 인한 현장 봉쇄는 도무지 끝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과연 집에 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다시 겔리볼루와 차나칼레에 갈 수 있을까. 어쩌면 내 유일한 희망인 계약 종료 후 터키 여행의 꿈조차 이루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부디 이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길 바랄 뿐이다.


다음 날이 되니 저녁식사 때 설날 특식으로 명절 음식들이 거하게 나온다. 조기와 갈비, 편육, 떡, 훈제 연어, 떡국... 이날을 위해서 그동안 반찬을 모으고 있었구나. 그간의 도시락 상태가 이제야 납득이 좀 간다. 다른 건 몰라도 훈제 연어만큼은 반갑다. 신촌에서 방을 빼기 전, 마지막으로 선택한 음식도 초밥이었는데. 한국에 가면 일단 초밥부터 실컷 먹어야지.


설 연휴 기간(쉬지는 못하지만)의 마지막 날에는 사장님이 직접 컨트롤룸에 찾아와 악수도 하고 새해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도 한다. 회사에서는 작업자들의 한국 주소로 한라봉을 한 박스씩 보냈다고 한다.


그래도 설날의 냄새를 마지막에 좀 맡는다. 그래.. 이 정도면 된 거지.










매거진의 이전글 현수교의 메인케이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