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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r 20. 2021

눈사람의 실존주의-2

[124일차]



짧은 하루 동안 눈사람은 많은 것들을 보았다.


수돗가에서 발을 씻는 사람들,

먼 허공을 보며 짖는 개,

깃발처럼 휘날리는 찢어진 방수포.


눈사람이 본 세상에는 움직이는 것들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본 모든 움직이는 것들에게 메르하바, 하고 인사를 했다. 움직이는 것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사람은 움직임과 인사를 구별하지 못했다. 놀랍고 즐거운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그리고 다시 멀어지는 그 움직임들을 그는 모두 인사라고 생각했다. 팔랑거리며 바람에 날리는 것, 먼 거리에서 천천히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 그에게 모든 움직임은 인사였다. 그러므로 모든 움직이는 것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자신 역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눈사람은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 자신이 그에게로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늘상 한 자리에 붙박여 있었지만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자신 또한 쉬지 않고 움직이느라 바빴으므로.


그러니까 '인사'를 하느라 바빴다는 것이다.



태양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거의 해가 질 무렵이었다. 눈사람은 무척이나 밝은 그것이 아주 오랜 시간을 걸쳐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나 긴 인사를 상상해본 적이 없던 눈사람은 문득 저 높은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던 동그란 것이 어느샌가 산 끄트머리까지 이동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쳐다볼 수조차 없었던 그것은 이제 많이 누그러진 붉은 빛을 뿜는 공이 되어 먼 산에 걸려 있었다.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산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태양을 보며, 눈사람은 그 커다란 규모의 인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언제 끝나게 될까.


그런 상상을 하면서 눈사람은 처음으로 '시간'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것은 처음 태양이 자기 머리 위에 왔을 때부터 저 먼 산 끝에 닿기까지 나눴던 수많은 인사들만큼이나 '많았'고,


산에 걸려 있던 태양이 마침내 산 너머로 꿀꺽 삼켜지기 전까지 움직였던, 동전 하나 정도의 길이만큼 '짧았'다.


눈사람은 물론 태양에게도 인사를 했다. 사라지고 있는 태양에게, 여전히 '메르하바'라고 인사했다. 그것에게 하는 인사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모든 움직임을 잊고 저물어가는 태양만을 응시했다. 막연하게,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과,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눈가가 따뜻해지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태양의 인사는 너무나 강렬해서 자신을 만들어 줬던 남자의 숨결보다 훨씬 빠르게 그를 녹였다.


태양이 마지막 빛을 뿜으며 산 너머로 삼켜지는 순간, 눈사람은 불현듯 인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겨나는 것'에게 하는 인사와,


'사라지는 것'에게 하는 인사.


그리고 사라지는 것에게 하는 인사를 알게 된 순간,


세상이 순식간에 어둠에 덮여버리고,


툭, 하는 소리가 발치에서 들려왔다.



두 눈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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