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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r 18. 2021

눈사람의 실존주의-1

[123일차]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눈사람이 생겼다.


누군가 만든 눈사람은 새것이었지만 더러웠고, 더러웠지만 유쾌했다.


유쾌하다는 것은 그가 만들어진 재료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Sultan 생수 패트병 뚜껑 네 개와 정체 불명의 플라스틱 하나로 만들어진 그의 엉성한 이목구비는 어수룩하고 착한 유령을 떠올리게 했다. 엇나간 V자로 하늘을 향해 아무렇게나 꽂힌 두 개의 팔이, 그 슬픈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엉거주춤한 그 모양새가 쑥스러운 춤 같기도 했고, 자신이 본 가장 커다란 어떤 물체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인사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헬멧을 쓴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아는 유일한 단어, '메르하바(안녕)'를 연신 외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 단어는 자신을 만들어 준 한 남자가 떠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유일한 말이었다. 남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게,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성대가 울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메르하바.', 하고 속삭이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그저 허공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인삿말은 그러나 눈에도 보이는 선명한 하얀 입김으로 날아가 눈사람의 얼굴에 닿아서 그의 뺨을 살짝 녹였다. 눈사람은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메르하바.'하고 남자의 말을 따라했다. 그는 그 말이 누군가를 녹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차가웠고 아직까지 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말을 쉽게 던졌다. 메르하바. 메르하바. 메르하바.


지나가는 사람들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 인사에 답해줬다. 메르하바. 날씨가 차가운 만큼 사람들은 어딘지 신이 나 있는 것 같았고, 눈사람은 세상이란 원래 이렇게 조금쯤 들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쉽게 웃고, 오늘 스쳐 지나간 사람에게 내일도 메르하바, 하고 인사를 건넬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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