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수아이 Apr 14. 2018

[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죽음이라는 완성'

Vous n'avez encore rien vu 2012 - 알랭 레네



죽음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끔찍한 재앙이, 누군가에게는 사후세계로의 통과의례일 수 있고, 어떤 실존주의자에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실존의 부조리적 결말이 될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 종종 죽음은 '완성'의 의미를 가진다. 예술가는 생전에 (       )을 추구한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으로, 빈칸을 메우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친다. 힘껏 추구하다 보면, 그들은 '결국' 이라든지, '종국'이라든지, '궁극'이나 '최후', '마지막'이라는 단어와 싸울 수밖에 없게 된다. 크레파스에서 모든 색을 덮어버리는 색인 검은색 크래파스처럼, 그들이 무언가 궁극적인 것을 이것저것 추구하다 필연적으로 도착하게 되는 결론은 항상 죽음이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그것을 직접 표현하는 방법은 바로 스스로 그것을 실행하여 완성하는 일이다. 자살하는 예술가라는 모티브는 예술의 역사와 항상 함께 해왔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다층적인 영화다. 할 수 있는 말이 많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몇 겹의 층위를 통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연극'과 '시간'과의 관계를, 누군가는 앙투완 당탁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연기에 몰입하며 생기는 현실과 무대의 간극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영화의 전면에 드러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흘려보내기 쉬운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영화 내부에서 상영되고 있는 <에우리디스>라는 연극과 배우들이 과거를 회상하듯 내뱉는 알쏭달쏭한 대사들이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일까.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에서 '본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적 행위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연극이 재해석한 원래의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죽은 에우리디스(에우리디케)를 죽음의 세계에서 데리고 나오며 오르페우스는 그녀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가지게 된다. 많은 신화에서 '돌아보면 안 된다'는 금기는 흔하게 발견된다. 보아선 안될 그것은 보통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든지, 어느 도시가 멸망한다든지, 마을이 물에 잠긴다든지 하는 '신들의 행위'이다. 인간을 벗어나는 것, 그것을 목격한 자는 반드시 죽게 된다. 


신화를 모티브로 재창조한 <에우리디스>라는 연극에서, 늙은 오르페우스(와 비교적 덜 늙은 오르페우스)는 도무지 과거를 알 수 없는 여자 에우리디스를 보자마자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도피생활을 한다. 그녀는 숨기는 것이 많다. 그녀에겐 많은 남자가 있었고 말할 수 없는 과거가 있었다. 오르페우스는 처음에는 그녀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 또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와 함께 훌쩍 떠났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과거와 정체를 알고 싶어 한다. 그는 그녀를 다그치기 시작하고 그녀는 도망치다가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오르페우스의 생각은 이렇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서로 비밀 없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고, 만약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진실의 힘을 믿는다.


에우리디스의 생각은 이렇다. 그러나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 둘의 관계는 사라지게 된다. 사랑은 진실이 없는 곳에서만 간신히 존재할 수 있는 미약한 것이다. 태양이 있는 곳에 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둘의 관계는 진실과 양립할 수 없다. 그녀는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오르페우스에게 '행복하다는 것을 받아들여!'라고 '절규'한다. 진실이 없는 세계에서 사랑이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그것을, '사랑'을 보라고. 다그치는 오르페우스에게 그녀는 '힘들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무엇을? '당신을 이해시키는 것'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에우리디스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르페우스는 그것이 사랑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가능한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생'의 세계에서, 이 딜레마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기어이 그 진실을 '보려고' 한다. 그는 알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등을 껴안은 에우리디스를 떨쳐내고,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것은 밝은 진실의 세계에서 명명백백히 드러난 선명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다


생의 세계에서 사랑은 진실과 공존하지 않는다. 생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은 익살극, 말도 안 되는 멜로드라마다. 오르페우스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부모와 같은 저급한 삶. 그는 '모든 것을 알길 원'했다. 그리고, 사랑을 원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이 있다. 무슈 앙리, 즉 죽음이다. 사랑을 택하느냐, 진실을 택하느냐의 딜레마에서, 애초에 의심하지 않았던 전제조건을 부순다. 둘다 가능한 유일한 세계, 그것은 엘리시온(Elysion), 즉 낙원(죽은 자들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그는 결국 그녀를 만나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스의 곁에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완성되었다. 


반전적으로 살아 등장한 앙투완 당탁 역시 최후에 죽음을 택했다.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죽음'을 택한다. 그것은 스스로 생의 세계에서 관측할 수 없는 '완성'이다. 살아있는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엉켜 결코 해결될 수없는 부조리들이, 죽음을 통해서 뫼비우스의 고리를 끊고 풀릴 수 있다. 누군가는 작품 속의 인물을 죽임으로써 희생제의를 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직접 그것을 실행한다. 2014년 3월 1일에 91세의 나이로 타계한 알랭 레네. 그는 스스로 죽을 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게 죽음과 마주했다. 그가 죽기 전에 영화에서처럼 자신이 창작한(지금은 늙어버린) 인물들과 일일이 작별 인사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결국 무엇을 완성하였을까? 이제 그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고. 죽은 그가 말한다. 적어도 당신은 아직 살아있지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