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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이피는섬 Feb 03. 2022

그림처럼

진정한 서른아홉 살

딱 한 번 그림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한때 화가를 꿈꾸었던 친구가 어느 날 꿈에 나온 장면을 그렸다며 직접 그린 그림을 주었다.


친구는 미처 표구를 못 했다며 나한테 표구를 맡기라고 했는데, 게으름뱅이인 나는 아직도 표구를 하지 않고 있다.


그림을 선물해 준 친구가 지방으로 내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종종 서로가 있는 곳을 오가긴 했지만, 예전처럼 오래, 깊이 있는 속마음을 나누며 함께하는 시간은 없어졌다. 그 사이 친구는 큰 병을 앓고 이겨내기도 했다.


친구가 선물했던 그림은 좀 더 밝고 넓은 집으로 이사 와서야 비로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공간이 달라져서일까? 그림이 전과 다르게 보였다.

조금 더 따뜻하게 보인다고 해야할까? 

물리적인 공간이 달라진 것도 있었지만 내 마음이 달라진 걸 수도 있다. 


멀리 화산이 연기를 뿜고,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달빛이 비치는 작은 옛집이 그려진 그림. 옛집 마당에는 나무 한 그루와 꽃들, 뛰어노는 고양이, 마당에 엎드려 잠든 거위 두 마리,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은 소녀의 옆모습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사한 집이 정리되고 정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아이들이 한참 손이 많이 갈 때라 나를 만나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일은 이제 친구에게는 가능하지도 않은 사치였다. 그런데 첫째 아이의 일로 우연히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올 일이 생긴 것이다.


친구는 이사한 새집을 구경하며 자기가 준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그린 그림이지만 나에게 선물했으니 그 친구로서는 오랜만에 본 그림이었다. 10년도 훨씬 넘은 그 그림이 새삼스러운 듯했다.


“이 그림, 지금 생각해도 참 잘 그린 것 같다. 나는 이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어.”

오래 그림을 들여다보던 친구가 말했다.

그림을 보니 그때 꿨던 꿈도 생각난다고 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이 꿈을 꿨을 때는 네가 지금까지 혼자 살 줄도 몰랐고, 고양이를 기를 줄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내 그림대로야.”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작은 옛집에 혼자 있는 소녀. 그리고 뛰어노는 고양이…. 

지금 사는 동네에 이사 온 첫해에 집 앞에서 울고 있던 새끼 고양이를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고양이랑 나는 아무 접점도 없었다. 그런데 친구가 내 생각을 하며 그려준 그림에는 소녀와 함께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나온다.


“와, 정말이네!”

우리는 오래전 친구가 꾼 꿈이 예지몽이었나 하며 신기해했다.


그러고는 멀리 연기를 뿜는 산은 무슨 의미였을까? 또 마당에 잠든 거위 두 마리는 무엇일까 이야기했다.

평온히 잠자는 듯, 꿈꾸는 듯했던 소녀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내 모습인 것 같았다.


멀리 화산이 연기를 뿜듯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아도, 작은 집에서, 혼자서 잠잠히, 나는 여전히 꿈을 좇으며 세상의 속도에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있다.

어릴 적 시시한 이야기에도 맞장구치며 좋아하던 시절처럼, 우리는 잠시 그렇게 즐거워했다.


십몇 년 전, 그때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친구는 지방의 교대에 들어가 임용고시 공부를 할 때였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막막해할 때 친구는 원하던 꿈을 접고 주어진 상황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내 생각을 하며 꿈속의 장면을 그렸을 오래전 친구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막막했던 나보다 어쩌면 더 힘든 상황이었을 그때의 친구의 마음. 나는 내 생각만 하느라 친구의 마음은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정원아, 아마 그때 네가 내 걱정을 많이 했나 보다. 내가 혼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잘 지내길, 이 그림처럼 평안하기를 네가 바라 주어서 이 모습이 꿈에 보였나 봐.”


정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나 보다.”


내가 가진 단 하나의 그림.


내가 평안하길, 그림 속 풍경처럼 행복하길, 언제나 잘되고 건강하길 바라는 친구의 마음이 담긴 그림.




김정원, <꿈속에서>(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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