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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이피는섬 Jan 29. 2022

매직 아워

진정한 서른아홉 살

어제는 설 연휴를 앞두고 평일인데도 일찍 퇴근했다. 회사에서 점심 식사 후에 자유롭게 일정에 따라 퇴근하라고 해주셨는데 남은 일들을 하고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회사를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중간중간 지하철이 지상으로 나오면 아직도 오후의 햇빛이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원래 미팅도 많고 외근도 많은 일이지만 코로나 상황이 심해지면서 차츰 미팅은 줄어들고 요즘에는 작가나 작업자들과 거의 전화나 이메일로 소통하고 있어서 오후 시간에 밖에 있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직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미세하게 해가 길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려면 꽤 넓은 공원 하나를 가로질러야 한다. 매일 퇴근길에 그 공원을 걷는 게 좋아서 집에서 더 먼 정차역에서 내린다. 한 정차역을 더 가서 내리면 바로 집 앞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지만 잠시라도 걷는 게 좋고 특히 그 공원의 느낌이 좋다.

공원길 끝으로 보이는 하늘이 해 질 녘의 노을빛과 저녁의 푸른 어스름으로 물들어 있었다.


매직 아워.

   

낮과 밤, 밝음과 어두움이 만나는 짧고도 아름다운 이 순간에게 누가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름이란 참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사람을 부르는 이름은 아니지만 이 시간을 부르는 '매직 아워'라는 이름도 그렇다.


'매직 아워'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은 영화 <라라 랜드> 덕분이다.

그전에는 낮에서 저녁으로 바뀌는 그 순간의 시간을 부르는 이름이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그 시간이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었다.

어서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시간, 혼자 길 위에서 그 순간을 맞이하면 갑자기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몰려들어서 서둘러 집으로 향했었다.


그런데 <라라 랜드> 영화를 본 후에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순간을 볼 때마다 더 이상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매직 아워의 순간을 보면 세바스찬과 미아가 아름다운 보랏빛 하늘 아래서 마법에 빠져들듯이 함께 춤을 추던 장면이 떠오른다.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의 마음도 설명할 수 없는 마법처럼 풀어져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에게 이 영화 속 장면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매직 아워'라는 이름이었다. 그 순간을 부르는 이름이 매직 아워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시간에 대한 내 오랜 감정의 인상이 바뀐 것이다.


영화 속 장면은 물론 무척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느껴오던 낮도 밤도 아닌 그 시간에 대한 애매하고 쓸쓸한 느낌을 모두 없애기엔 영화는 영화일 뿐. 내 경험과 기억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매직 아워라는 그 이름은 내 느낌과 감정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부르게 되는 이름이다. 다른 이름을 찾지 않는 이상 나는 그 순간을 계속해서 매직 아워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게 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사라졌다.

더 이상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애매모호한 시간이나 이유 없이 쓸쓸한 시간도 아니다.


이제 매직 아워는 나에게도 마법처럼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순간, 새로운 감정과 이야기가 펼쳐지려는 순간이 되었다.


참 신기하다. 바뀐 거라고는 몰랐던 그 이름을 알게 된 것뿐인데.


매직 아워처럼 아직도 세상엔 내가 모르는 많은 이름과 아름다움들이 있을 거다.

매일 하나씩 그것들을 발견하며 산다면 사랑하게  존재와 순간들도 더 많아지겠지.


어제 매직 아워 속 공원길을 걸으며 그런 동화 같은 생각을 했다.


이게 다 매직 아워의 매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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