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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notyoon Oct 11. 2023

#8 비료 포대 참호, 새총, 잔디 소파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이나 할 수 있었던

  지난 추석 연휴에는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내가 자란 동네는 그대로인 듯했지만 많은 게 변했다. 할아버지, 고모, 아빠, 오빠,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나무는 더 자라 있었고 학교 가는 길에는 페인트로 표시된 인도가 생겼다. (이전에는 ‘인도’라는 게 없었다.) 세 살배기 오빠가 가서 파마를 했던 미용실의 간판이 바뀌었고, 오래된 동네 슈퍼 앞에는 24시간 편의점이 생겼다. 동네를 다니면 ‘누구네 집 딸, 아들’이라고 알아보시고 인사를 건네던 어른들이 없어졌고 마을 입구 앞에는 깨끗한 주차장과 정자가 생겼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동네에는 놀이터가 없다. 사실 나는 ‘집 앞 놀이터’라는 개념을 드라마를 보고 처음 알았다. 나를 포함한 동네의 소수 정예 어린이들은 온 동네를 누비며 놀이터 없이도 재미있게 놀았다.




1. 비료 포대 참호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어 관련된 용어를 쓰는 게 조심스럽지만, 유년시절의 아무 뜻 없는 놀이었으니 너그럽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소수 정예 어린이에 포함되는 건 오빠와 나, 그리고 다른 언니까지 총 세 명이었다. 우리는 주로 전쟁놀이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굳이 전쟁놀이였는지 모르겠다. 아마 한정된 환경에서 다른 시설이나 도구 없이 상상력만으로 가능한 놀이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나는 어떤 놀이를 하든 언니, 오빠들이 같이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막내였다.


고향에 다녀오면서 찍어온 내 놀이터


  마을회관 한쪽에는 경운기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비료 포대가 쌓여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를 참호로 삼고 반대편에 있는 적들의 공격을 피하고 솔방울 수류탄을 던진다. 비료 포대 사이를 빠르게 돌아다니고 경운기를 넘어 다니면서 최선을 다해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다가 동네 어르신에게 경운기를 넘어 다니는 걸 들키면, 소리를 지르면서 경로당 뒤편으로 도망을 갔다. 숨죽이고 기다리다가 다시 나와 또 솔방울을 던지고, 비료 포대 뒤에 숨고. 해가 질 때까지 아무도 없는 적진을 노려보며 우리는 그렇게 놀았다.


2. 잔디 소파


  잔디를 깎으면 예초기의 기름 냄새와 풀, 흙냄새가 섞여 특유의 냄새를 만들었는데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그리고 잔디를 깎은 뒤에 만드는 잔디 소파를 좋아했다. 아빠가 예초를 시작하면 집 창문을 다 닫고 집 안에서 기다렸다가 대충 마무리가 되면 오빠랑 쇠스랑 하나씩을 들고나간다. 쇠스랑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잔디를 긁어모으면 꽤 불룩한 잔디 더미가 된다. 모여있는 잔디 더미를 한 곳으로 모아서 양을 늘린 후에 쇠스랑으로 모양을 다듬으면 빈백 모양의 잔디 소파가 된다. 엉덩이가 찔릴 수도 있으니 장갑 낀 손으로 엉덩이 부분을 꾹꾹 잘 눌러주는 게 중요하다.


우리 마을은 가을 햇살에 빛나는 벼가 정말 예쁘다.


  모양이 대충 만들어지면 눕는 것처럼 풀썩! 잔디 소파에 앉는다. 잔디 소파에 앉으면 닭들이 왜 쌀겨를 두툼하게 깔아주면 좋아하는지, 송아지 축사에 왜 볏짚을 푹신하게 깔아주는지 어렴풋이 이해됐다. 비릿한 풀냄새와 보송하고 푹신한 느낌이 기분 좋았다.


3. 새총


  전지를 하면 잘린 나뭇가지가 많이 나온다. 그러면 오빠와 나는 나뭇가지를 열심히 뒤집어 가며 적당한 모양을 고른다. 정직한 Y자 모양의 가지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곁가지를 부러뜨리고 아빠의 톱을 빌려다가 적당한 길이로 자르면 새총이 된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중요하다. 할아버지의 맥가이버 칼을 빌려 나무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야 한다. 나무의 하얀 단면이 나올 정도로만 벗겨내야 뽀얀 베이지색의 핸드메이드 새총이 탄생한다. (내 새총은 오빠 것만큼 뽀얗고 예쁘지 않아서 오빠 새총이랑 몇 번 바꿔치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창고에서 두툼하고 까만 고무줄을 찾아 새총에 걸면 진짜 ‘새총’이 완성된다. 아, 그렇다고 우리가 진짜 동물을 향해 총을 쏜 적은 없다. 주변에 떨어진 솔방울이나 작은 돌멩이를 주워다가 누가 멀리 던지는지 시합하는 게 우리의 새총 놀이였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자주 멍때리던 마을 저수지


  이런 시간 덕분에 얻게 된 능력(?)도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잘 보낼 수 있고, 아무것도 없어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을 긁어모아 자꾸 무언가를 만들어 낸 탓인지 지금도 손으로 하는 건 곧잘 하는 편이다.


  먹는 것에 이어 노는 것까지 자급자족했던 시골 생활. 정말 어릴 때는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조금 어릴 때는 아쉽고 불만스러웠다. 그때보다 약간 자란 지금은, 그 시간이 썩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에 태어난 사람의 삶이라기엔 조금 이상할지 몰라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부족하다는 느낌 없이 있는 대로 충분히 즐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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