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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notyoon Oct 22. 2023

#9 나의 건강물 해방일지

더 이상 보리결명자산수유오가피물을 마시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까지는 이전에 살던 시골에 대한 아련함(?)과 장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꽤나 만족스럽고 즐거운 도시 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지만, 혼자 도시에 살면서 누리는 가장 좋은 점은 ‘건강물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이다. 시골집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우리 집에는 정수기가 없었고 물을 항상 끓여서 먹었다. 물을 끓여서 먹는 건 문제가 없다. 간장게장 집의 시원한 보리차와 닭볶음탕 집의 시원한 검은콩차를 마실 때의 기분은 생각만 해도 고소하고 짜릿하다. 하지만 그 물이 더 이상 보리차나 검은콩차가 아니라면…?


우리 집의 ‘건강물’ 역사에 대해 오빠와 나눈 대화를 옮겨본다.


“오빠, 우리 그 건강물 진짜 싫어했잖아. 내가 물에 넣었던 것들 종류 세어봤더니 딱 열개더라고? 무, 결명자, 옥수수, 구기자, 산수유, 둥굴레, 보리, 오가피, 검은콩, 옥수수수염. 진짜 오바지 않냐.”

“야 아니야. 하나 더 있어.”

“엥? 뭐가 더 있지?”

“와.. 너는 어떻게 이걸 까먹냐”

“아 진짜 모르겠는데? 무우? 아까 말했어!”

“아니야.. 잘 생각해 봐.”

“열 가지보다 더 많다고?”

“응”

“진짜 모르겠는데.”

“돼지감자…”

“….!”


그렇다. 우리 집 건강물에 들어갔던 재료는 무려 11가지였다. 물에 들어가는 재료만 해도 한 선반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물론 그 11가지가 모두 동시에 들어가는 건 아니었지만 주로 5-6종류의 것들이 함께 들어가 ‘무병장수를 위한 건강물’이 되었다. 보리결명자산수유오가피물이나 무옥수수구기자돼지감자물처럼…


재료마다 그럴듯한 이유는 있다. 무는 위가 안 좋은 엄마를 위해, 결명자는 눈이 안 좋은 나와 오빠를 위해, 돼지감자는 당뇨가 있으신 할머니를 위해, 오가피는 간이 안 좋은 할아버지를 위해… 이렇게 온 식구의 건강을 위하다 보니 생각만 해도 목이 서늘해지는 물이 되었다.


거의 20년 동안 꼼짝없이 건강물을 마셔야 했던 나는 독립과 동시에 건강물에서 해방되었다!


맑고 깨끗한 생수를 마실 때면 어찌나 기분이 상쾌한지. 이 기분은 물의 시원함 때문만이 아니라 건강물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 때문일 거다. 지금도 종종 보리차나 녹차를 냉침해 마시기도 하지만 절대 그 이외의 종류는 집에 들이지도, 마트에서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성적인 이유를 대보라고 해도, 건강물에 대해 할 이야기는 많다. 수분을 없애고 말린 재료들을 물에 넣고 끓인다 한들 건강에 영향을 미칠 만큼 좋은 성분들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괴상한 조합으로 끓인 물 때문에 나는 물 마시기를 싫어하게 됐다. 끓인 물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매일 새 물을 끓여야 한다. ‘물’에 들어가는 노동이 너무 많고 효율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더 확실한 이유를 대라면 그것도 말할 수 있다.


“맛없어!”


신선하고 건강한 재료들이 넘쳤던 시골에서 유일하게 가장 건강하지 않을 것 같았던 ‘건강물’. 시골집에 내려가면 싫고 불편했던 것들도 아련하게 느껴지는데, 인상이 찌푸려지는 딱 하나가 있다면 그건 바로 ‘건강물’이다.


어찌 되었든 내가 사는 우리 집에는 더 이상 돼지감자도, 오가피도, 산수유도, 구기자도 없다!

나는 이제 건강물에서 해방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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