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이중에 카카오톡 멀티프로필 쓰는 사람 없지? 친구끼리 '그런 사람' 있으면 나 진짜 서운해."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아주 날카롭게 낚아채는구나. 동기 S가 말한 '그런 사람'이란 바로 나였으니까. 동기들과 카카오톡 친구가 된 지 세 달 정도 되었을 무렵, 나의 머릿속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사사롭지 않은 듯 사사로운 카카오톡 프로필을 볼 수 있는 친구 사이, 그게 우리의 사이가 맞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의 끝에 동기 전원을 예쁜 카페에서 몇 년 전에 찍은 뒷모습 사진의 프로필에 가둬 버린 것이 바로 하루 전의 일이었다. 아무 배경 사진도 없이 이름 석자만 덜렁 남기지 않은 것이 손톱만큼 남겨본 나의 양심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
나와는 뜻이 달랐던 건지 동기들은 S의 물음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이구동성으로 "당연하지. 동기가 남이가! 우리는 친구잖아!"라고 외쳤다. '아무래도 남이긴 하진 않은가.'라는 생각이 목구멍을 타고 울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을 참느라 혼쭐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상 입사 초반 6개월에서 1년 사이의 허니문 기간을 지나면 자연히 몇 안 되는 승진 TO와 성과급 배분을 위한 지옥의 레이스가 시작될 것이 자명했다. 대세는 동기들 사이에서 '진실된 친구로서 진한 우정을 나누는 동료'가 되는 것에서 순식간에 '누가 누가 잘하나'의 '누가'가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 암묵적으로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런 이유로 동기들과 즐겁게 어울리면서도 이 불편한 진실이 내내 신경이 쓰였다. 그중에서도 동기 H가 거슬렸다. 같은 직무이지만 핵심 부서에 배치되어 구김 없이 밝고 당찬 매력을 가진 H와 있으면 정 반대의 위치에서 어딘가 서걱거리는 내 모습은 그 차이가 다른 동기들과 함께할 때보다 더 도드라졌다. 이 간극에서 어쩐지 스스로가 더 작고 초라한 느낌을 받곤 했다.
아마 이 마음의 정체는 미묘한 경쟁심과 자격지심이었을 것이다. 내로라하는 스펙임에도 소위 '비주류 부서'에서 소심하고 조용하게 처박힌 나보단 메인 부서의 방대한 인프라 속에서 안 그래도 반짝이면서 날개까지 단 듯 보이는 H가 마냥 부러웠다. 그래서 H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사이좋은 척 속으로는 질투의 불꽃을 피우고 있는 걸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앤디가 순진한 얼굴로 모두가 살인을 불사할 정도로 간절하게 원하는 포지션을 너무나 쉽게 차지하는 것을 보던 에밀리라면 내 마음에 구구절절이 공감해 줄텐데 싶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저널리스트라는 꿈을 품고 뉴욕에 온 앤디가 우연한 기회에 패션잡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로서 취업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영화 초반 돌체앤가바나나 마스카라 같은 것도 몰랐으나, 특유의 총명항과 당찬 모습을 내비치며 취업에 성공한 앤디였다. 그에게 일을 가르치고 챙겨주는 척 텃세를 부리던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에밀리다.
출처 : 네이버영화
에밀리의 배경에 대해선 영화 속에서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으나, 자신이 사랑하는 패션에 모든 걸 바쳤고 그럼에도 뭔가 남았다면 또 바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의 성역인 패션에 불한당처럼 찾아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가는 앤디를 보며 동료이자 사회인으로서의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에밀리다. 그러면서도 앤디의 당당한 태도 앞에서 지나치게 눈을 깜빡이며 모습이나 갑자기 세련된 차림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앤디의 변화에 긴장감을 느끼는 모습에서 그의 초조함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앤디의 성장이 일정 수준에 다다를 무렵, 그들의 관계는 첫 번째 변곡점을 맞이한다. 패션계 유명 인사가 총 출동한 이브닝파티에서 에밀리와 앤디는 미란다를 대신해 수많은 인물들의 이름, 출신배경, 가십거리 등을 외워 미란다의 사교생활을 지원한다. 마치 인간 외장하드처럼 말이다. 본래는 에밀리 혼자 맡아오던 일이기에 수행의 주체는 대체로 에밀리였지만, 에밀리가 기억하지 못한 단 한 사람이 미란다에게 반갑게 인사해 오던 절체절명의 순간 앤디가 도움을 주며 둘의 사이의 기류는 묘하게 온난해졌다.
출처 : 네이버영화
변곡점은 영화 밖으로도 찾아왔다. 당시 변방에 있는 비주류부서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복이 터졌던 우리 팀이었기에 항상 허덕였다. 팀원이래 봐야 관리자형 팀장님에 이제 겨우 3년 차 사원인 사수와 신입사원인 나뿐이었다. 자연스레 회사 시스템에 익숙해지기 전부터 온갖 R&R을 넘겨받은 상태에서 야근을 줄다리기 식으로 이어갔고, 모르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갔지만 나보다 더 큰 짐을 짊어지고 묵묵히 일하는 사수를 붙잡고 물어보기도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폭풍 같은 연장근무의 늪에서 벼랑 끝에 몰린 기분까지 들었을 때 뜻밖에도 동기들이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항상 로그온 상태라 단체 메신저방의 등대가 된 나에게 퇴근하며 몰래 쥐어주던 작은 간식. 혹여 CC에서라도 만난다면 어떻게든 잘 지내냐고 고생 많다고 위로해 주는 소소한 인사. 사수에게 물어보기 애매한 회사 프로세스나 업무 지식도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선에서 공유해 준 자료. 부문도 팀도 다양한 우리였지만 입사동기라는 하나의 울타리 속에서 상부상조하며 보내는 시간은 H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단순한 동료 이상의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물론 내가 예상했던 관계의 위기도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왔다. 첫 고과 발표가 나고 연봉의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동기들 간 부서의 업무분장 탓에 일을 하며 불가피하게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게다가 나는 부서는 달랐지만 같은 직무였기에 항상 방대한 R&R에 쫓기듯 일하는 나보다 자신만의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앞으로 치고 나가는 H에 대한 말 못 할 열등감이 자라났다.
본디 흐르지 못해 고이는 것들은 골이 깊어지다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나와 H의 관계도 그랬다. 첫 고과 발표 이후, 부러움을 가능한 가장 못나고 날카로운 표현으로 H에게 날려 보내며 날 선 대화가 대화가 몇 번 오갔다. H가 가는 자리엔 내가 없고, 내가 가는 자리엔 H가 없는, 그러다 둘 다 한자리에 있으면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두 달을 보냈다.
나와 H의 사이는 커다란 독 바닥에 난 구멍을 두꺼비로 막아놓아 물이 줄줄 새지만 어떻게든 이어져 가고 있었다면, 에밀리와 앤디 간 감정의 둑은 파리 패션위크에 내정자인 자신이 아닌 앤디가 가게 된 사건을 기점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끊임없는 평가 속에서 경쟁하면서도 온정을 두고 받았던 둘의 사이였지만, 앤디가 에밀리를 추월하며 잔인하게 앞으로 치고 나가는 순간부터 에밀리의 분노는 분화 주기가 돌아온 화산처럼 무서운 기세로 폭발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또 화산이 터지고 독의 바닥이 조금 깨진다고 세상이 무너진 적이 있었던가? 화산이 터진 주변은 화산재를 주변으로 형성된 비옥한 토양이 생명의 힘을 가득 머금는다. 깨어진 항아리는 접착제로 이어 붙여 쓰거나 아니면 오히려 산산조각 낸 다음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중요한 것은 파편의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관계는 언제든 산산조각 날 수 있다. 그것이 아주 느릿하든 갑작스럽든 말이다. 금이 가는 순간에서 끝으로 단정 짓고 그 후의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한다면 그 상태는 '파괴된 것, 완결'로 끝날 뿐이다. 하지만 나와 H, 에밀리와 앤디는 부서진 관계의 조각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선 H와 나 중에서 먼저 조각을 주워 든 사람은 나였다. 오랜만에 가진 둘만의 술자리에서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던 소주를 기울이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졌던 부끄러운 감정의 바닥을 드러냈다. 나보단 불같은 성미였던 에밀리에겐 앤디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에밀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파리 패션위크에서 돌아와 자신의 인생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저널리스트로서의 커리어', 그리고 '자신을 아껴주는 소중한 사람들'임을 깨달은 앤디가 <런웨이>를 떠나며 에밀리에게 파리에서 사 온 옷들을 잔뜩 선물하며 화해의 전화를 건넨다. 후련한 표정으로 휘청거리며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던 H와전화를 끊으며 입이 찢어지게 환한 미소를 짓는 에밀리의 모습이 어쩐지 겹쳐 보였다.
우열과 다툼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도, 이로 인한 깨어짐을 정해진 결말이 아닌 깊어져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 여유. 그런 여유가 있다면 앞에 '회사'라는 단어가 붙더라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이중에 카카오톡 멀티프로필 쓰는 사람 없지?"라고 다시 물어주었으면 좋겠다. 이번엔 나도 빼지 않고 "당연하지."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