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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란 Nov 03. 2024

자존감이 후드득 떨어지는 날

J선임과의 사적인 대화, 그리고 영화 '월플라워'로 자존감을 충전했던 날

    박제가 돼버린 천재는 모르나, 백치가 돼버린 수재가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일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배경지식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직무로 시작한 사회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부서 기초자료를 공부하며 간간히 사수가 던져주는 단순 업무를 수행하는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그 간단한 것들조차 질문과 검색 없이 넘길 수 없었다. 주변에서 '일 잘하고 사회생활 좀 한다'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따라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왕년에 동네에서 공부 좀 하는 수재였다는 얄팍한 자부심을 잔인하게 부수고 지나가는 현실이었다.


 자존감은 무서운 기세로 추락하며 지표면을 뚫고 멘틀을 향했다. '그래도 아직 입사 초반이니까 괜찮아.'라고 되뇌며 주말 사이에 정신머리를 다잡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월요일 오전 9시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꺾여버리고 마는 나의 의지가 그저 얄미울 뿐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질책을 하거나 재촉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수는 주변에서 나를 행운아라고 부를 정도로 너그러웠다. 조금 느리거나 실수를 할 때 한숨은 한 번 정도 포옥 내쉬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다시 해 보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의 옹졸한 마음가짐은 스스로를 비(非)운아로 만들고야 말았다. 나를 측은해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괜찮다는 위로들은 어쩐지 나의 고막을 통과한 순간 그 정체를 "괜찮아. 나는 네가 거기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적이 없단다."라는 말로 순식간에 돌변하여 내 속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아프게 찌르는 바이러스로서 활개 쳤다.


전례 없는 바이러스의 융단폭격에 열을 펄펄 끓어올려 맞서 싸울 기운마저 없던 나였다. 하루하루 더 위축되고, 위축되니 더 실수하고, 이것이 반복되니 점점 지쳐가며 짜증스러워하는 사수를 보며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돌파구를 궁리해야 했지만 이내 덮쳐오는 무기력 앞에 무너졌던 시기였다.


······.


-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J선임이 말했다.  

"그냥 너 나오는 대로 해."


 인턴 시절 사수였던 J선임은 나와 참 닮았다면 닮고, 다르다면 달랐던 사람이었다. 생각이나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나와 비슷했지만, 나와 달리 항상 당차고 자신감이 넘치며 모두에게 인정받는 팀의 키맨이었다. 그와 보냈던 시간은 두 달 남짓이었으나 막연하게 동경하는 마음에 계속 연락을 이어가고 있던 터였다. 함께 있다 보면 언젠가 그처럼 당당한 사회인이 되어있을 것만 같은 확신을 주었다. 항상 나에게 신뢰감을 주던 특유의 날카로우면서도 담담한 어투로 그는 말을 이어갔다.


 "너 지금 네 마음대로 회사 사람들이 너에 대해 갖는 기대치를 정의하고 거기에 마냥 맞추려고만 하는 건 아니니? 내가 본 넌 사람과 일을 정말 좋아하고 이것들에 너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찾던 아이였어. 그래서 오히려 어떤 사람으로 보이려고 정해서 노력하는 것보다 그냥 나오는 대로 하는 게 제일 자연스럽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 생각해."


 그 순간 대화를 나누던 성동구 지하의 작은 술집에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일순간 어둑어둑하고 불편한 바테이블은 온데간데없고 차를 타고 샘과 페트릭 남매와 도로를 질주하며 처음으로 자유를 맞이하는 찰리가 된 듯한 나를 마주했다. 마치 영화 '월플라워'처럼 말이다.




 영화 '월플라워'의 주인공 찰리는 모종의 사건과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며 위축되었다. 인생의 황금기라는 고등학교 시절이 그에겐 그저 '정상인'을 연기하며 말없이 버티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그러다 그와는 정 반대인 샘, 패트릭,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마음의 빗장을 열게 된 찰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가며 점차 학교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특히 찰리가 영화 중후반부 문학수업 시간에 양복을 입고 나타나 반 친구들에게 조롱을 받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학기 초의 위축된 찰리가 아니기에 '이게 나야'라는 듯 씩 웃어 보인다. 양복이라니. 자유롭고 활기가 넘치는 미국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의 주인공이 입기엔 꽤나 고리타분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양복은 캐주얼로 대변되는 주류에 반격하며 비주류로서 어떻게 학교를 장악할지 보여주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양복을 입은 찰리는 거침없었다. 주류로서 연기하며 투명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며 그는 업(業)에서의 성과와 관계에서의 성장을 모두 이루어 냈다.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학교라는 공간에서 말이다.


 어느 정도 눈치를 보고 틀에 맞춰 가는 것이 필요하지만, 주류로 대변되는 업무 방식과 사회생활의 정석을 따라가려는 나의 노력은 내가 생겨먹은 그릇을 생각했을 때 영 삐딱선을 타고 있던 모양새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건 주변에 보이는 정석이라는 방식을 맹목적으로 따르려 애쓰기보단 나만의 방식으로 적응하려는 실질적인 노력이었던 것일지도.


 J선임과의 대화를 마치고 술집을 나서던 그날 밤, 입사한 3개월 중 그 어느 날 보다 발걸음이 홀가분했다. 다음 날 나만의 양복을 무장하고 회사로 갈 예정이었다. 주눅 들고 절망하기엔 회사와 그 속의 시선들이 더 이상 무섭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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