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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Jan 05. 2022

엄마의 특별한 방학숙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어느 날 내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갑자기 죽게 된다면?' 나에겐 아이들에게 남길 수 있는 그 흔한 생명보험 하나조차도 없다는 자각에서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가정주부인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 없으니 남편과 상의하에 남편 보험만 들어놓았다.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다는 현실은 왠지 모르게 서글펐다. 독박 육아를 하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보낸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가시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 없다는 사실도 불편했다. 무엇이라도 남기고 싶었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글쓰기였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가치에 의미를 두었는지, 아이들과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를 글로 남겨두면 엄마가 곁에 없어도 아이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재산보다도 더 의미 있는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자신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엄마의 글을 읽으며 아이들은 좀 더 수월하게, 재밌게 한국어를 배울 수도 있다. 아무 일 없이 잘 산다면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결혼할 때 아이들의 이야기를 묶어서 선물로 주고도 싶었다. 


2주 전 아이들의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놀 생각에 한껏 들떠있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숙제를 내주었다. 방학 동안 마음껏 놀아도 된다고. 다만 딱 한 가지 엄마가 내주는 숙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3주 동안 해 놓으라고 했다. 특별한 숙제는 내가 아이들에 관해 쓴 에세이 두 편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독일어와 영어보다 한국어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에게 한국어 공부 차원에서 내준 숙제였다. 읽고 쓰는 데 초등학교 2-3 학년 수준인 아이들이 하기엔 쉽지 않은 과제지만 의미 있는 일이니 한번 해보라고 했다. 


2주간 탱자 탱자 놀던 아이들이 이제 슬슬 번역을 시작했다. 단어의 의미를 물어보고 번역한 문장이 엄마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지도 확인했다. 글을 번역한다는 것은 단어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맥을 파악해서 다른 언어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아이들은 엄마의 글을 이해해야 하고, 생각도 많이 해야 한다. 아이들의 한국어도 자연스럽게 향상될 것이다. 얼마나 완성도 있는 독일어 번역본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기발한 숙제를 생각해 내다니!' 나 자신이 아주 자랑스럽다. 


번역을 통해 한국어가 눈에 띄게 향상하기를 기대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기발한 엄마 위에 얍실한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녀석들이 구글 번역기 꼼수를 사용했다. 다행인 것은 알다시피 구글 번역기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 아무리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도 스스로 읽고 문맥을 이해해서 번역해야 매끄러운 번역이 된다는 것이다. 괜찮다. 그 정도 꼼수는 봐줄 수 있다.  


아이들이 숙제를 완성하면 난 내 에세이의 독일어 번역본을 두 개 얻는다. 미성년자 노동력 착취가 아니고, 일종의 공짜 과외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번역을 마치면 독일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보내주려고 한다. '친척들을 위해서도 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정기적으로 이런 번역 숙제를 시켜야겠다. 몇 년 후에 나는 훌륭한 개인 번역가 두 명을 얻게 된다. '영어로도 번역을 시켜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기는 아이디어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As good as it g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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