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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Mar 07. 2023

억울한 노란 그네

어른다운 어른이란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부르던 시절.

3학년 때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다.여러 가지 놀이 기구가 제대로 갖춰진 놀이터는 처음이라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거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 노란 그네가 있었다. 쇠로 된 고리들이 연결되어 있던 줄은 오래 잡고 있으면 손에서 쇠 냄새가 났다. 엉덩이 받침 부분은 노란색으로 페인트칠이 된 딱딱한 나무 재질이었다. 앉아있다 보면 엉덩이가 아파서 차라리 서 있는 것이 편한 그네였다.


따뜻한 햇볕과 반짝이던 모래가 있던 평화로운 오후. 여느 때처럼 난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몸이 하늘로 부웅 떠올라 하늘에 잠시 닿았다. 배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견디고 나면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네를 타고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를 더 좋아했다.

다시 하늘로 떠올라 구름과 인사를 한 듯한 착각도 잠시, 등으로 바람을 가르며 바닥 가까이로 내려오던 중 그네 쪽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두 살 정도의 아이가 보였다.

순간 당황했지만 공중에 떠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나의 최선은 아마도 소리를 지르는 일이었을 텐데, 앞으로 벌어질 일이 상상이 되어서였을까? 너무 놀란 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아이는 멈추지 않고 내 쪽으로 다가왔고 공중에서 멈출 수 없었던 내 그네의 나무의자와 아이의 얼굴이 부딪히고 말았다.


그때의 충격은 꽤나 오래갔다. 꿈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여러 번 재현됐다. 

나무 받침대에 부딪힌 아이의 콧방울이 찢어져 덜렁거렸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곱슬머리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서있는 나에게 아이의 엄마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이를 치켜들고 나에게 보이며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던 것 같았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가해자가 되어버린 상황과 질타하는 듯한 어른들의 시선에 시간이 멈춰버린 듯 난 멍하니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네를 타고 하늘에 떠 있던 초등학교 3학년 생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네는 작동을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도 없는데 말이다. 

아이가 엄마 곁을 떠나 위험한 곳으로 걸어오고 있는 동안 그 엄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다른 아줌마들과 여럿이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이의 엄마는 수다를 떠느라 아이가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 같다. 다친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병원으로 달리는 게 우선이었을 텐데 그 엄마는 탓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어쩌면 병원비를 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네를 타고 있던 내가 일부러 한 게 아니라는 것을 공중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어른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나에게 다가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상황을 이해해 보려는 어른도,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어른도 아무도 없었다.


얼마 후 우리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엄마는 다친 아이를 데리고 집까지 찾아와 나의 엄마에게 따졌었다. 아이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했던 나는 무서워서 방에서 조용히 울었다.

엄마가 나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변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나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설명을 했다면 억울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의 난 많이 어렸다. 


그날 난 어른들에게 많이 실망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고의 책임을 공중에 떠 있던 3학년 아이에게 물으려고 한 아이의 엄마,

가만히 보고 서 있던 주변 아줌마들,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항변할 기회도 주지 않았던 나의 엄마,

어렸지만 부당하다는 느낌과 함께 보호받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어른이 되지 말자는 어렴풋한 다짐을 그날 했던 것 같다. 

노란색 그네도 다시는 타지 않았다. 어느 날 가 보니 사고가 잦았던지 나무 받침의 그네가 모두 고무재질의 그네로 바뀌어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된 것은 아이를 지켜보고 있어도 지켜주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육아에 지친 엄마들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고 나누는 수다가 얼마나 단비 같은지도 잘 안다. 엄마가 로봇도 아니고 아이가 노는 시간 내내 아이만 쳐다볼 수도 없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고 해도 아이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아차린 순간, 슈퍼우먼이 아닌 보통의 엄마들이 순간 이동으로 사고를 막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아이들에게 크고 작은 사고가 났을 때 과거의 그네 사건이 생각났다. 그네 사건을 교훈 삼아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꼭 확인한다. 똑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주의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친 아이와 다치게 한 아이 모두의 입장을 들어 본다. 다친 아이를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지만 누구의 고의가 아닌 단순 사고의 경우 순식간에 가해자가 되어버린 놀란 아이에게도 괜찮다는 얘기를 꼭 해 줘야 한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한 사건이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억울한 게 많은 민족이다. 나마저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더하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다운 어른은 최대한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일을 해결하는 사람이다. 내 일이든, 남의 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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