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아, 주말에 시간 있니? 나하고 한강 크루즈 파티에 같이 가자."
대학교에서 단짝이었던 친구는 외국인들의 한국 정착 서비스를 도와주는 리로케이션 회사에 다녔다. 하루는 친구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회사 홍보를 해야 한다며 한강 크루즈 파티에 같이 가자고 했다. 불어불문학과를 전공했고, 캐나다로 영어 연수를 다녀왔지만 한국에 살면서 외국어를 쓸 기회가 전혀 없던 나에게 친구의 제안은 상당히 신선했다. 여름밤 유람선을 타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친구의 제안을 바로 수락했다. 당시는 2002년 FIFA 월드컵 시즌. 아시아에서 열린 첫 FIFA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하게 되어 온 나라가 6월 내내 축제분위기였다. 그날의 파티가 친구 회사를 홍보하고 잠재적인 고객을 확보하는 데 성공적인 파티였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함께 따라갔던 나로서는 지루했던 내 삶에 국제적인 터치를 더한 유익한 저녁이었다.
크루즈 파티에서 만났던 독일 친구가 다음날 독일문화원에서 보여주는 독일 축구경기에 나와 친구를 초대했다. 당시 한국 정규방송에서는 독일팀이 출전하는 경기를 다 중계해주지 않아 독일인들은 독일 문화원에 모여 축구 경기를 관람했다. 평소에 축구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월드컵 분위기에 휩쓸려 일시적 축구팬이 되어버린 우리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미지의 세계로 이끌리듯 독일문화원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 미래의 남편이 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말이다. 그곳에서 알게 된 마틴은 모 회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던 독일인이었는데 나와 친구가 불어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프랑스계 독일인 동료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2미터에 육박하는 큰 키에, 모범생처럼 잘생긴 얼굴의 남자였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시작이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모험"과 "안정"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의심 없이 "안정"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목표를 세웠고, 허무맹랑한 목표보다는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세워 그 목표를 하나씩 달성하면서 소소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즐겼다. 벼락부자를 꿈꿔 본 적도, 대단한 성공을 이루고 싶어 한 적 없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생각하며 사는 타입이었다. 내가 추구하는 행복의 개념에는 스릴 넘치는 재미보다는 안정적인 미래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남자를 사귈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력적인 사람보다는 두루두루 나와 맞는 사람을 쟤고 골랐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금감원에 제출하는 공시 업무를 담당하던 27세의 안정적인 직장인이 3개월 간의 일정으로 인턴쉽을 하기 위해 독일에서 온 대학생과 사랑에 빠지는 일 같은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부모님의 강요로 선을 종종 봤다. 대부분 아빠 친구의 아들들이 많았고, 그렇게 만난 그들은 중산층 가정에서 곱게 자랐지만 뚜렷한 목표 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있었기에 새로울 것도 매력도 없는 만남이 대부분이었다. 미래의 남편은 눈빛부터 달랐다. 입시에 찌들었던 고등학생에서 술에 찌들었던 대학생으로 성장하여 결국은 가족과 사회의 기대에 맞춰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과 달리 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삶에 대한 의욕이 넘쳤고, 스스로 세운 목표가 뚜렷했고, 방학에는 인턴십을 해서 쓸 돈을 버는 자립적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는 것이 많아 어떤 화제에 대해 대화를 나눠도 대화가 끊기는 적이 없었다. 특히 세계 역사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 안으로 쏙 빠져들어가 '역사가 언제부터 이렇게 재미있던 주제였던가'하며 집중해서 들었다. 타인의 지적인 매력에 약한 나는 그렇게 여자 백과사전이었던 언니를 거쳐 남자 백과사전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2002년 여름은 특별했다. FIFA 랭킹 5위의 포르투갈을 이기고 한국이 16강에 진출하면서 축제의 열기는 더욱 불타올랐다. 한국인들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느꼈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월드컵을 승리로 이끈 히딩크 감독 덕분에 한국인들은 외국인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길거리 응원이라는 개념도 그때 자리 잡았는데 서울 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 사거리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었고 길을 꽉 메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축구경기를 관람했다. 어릴 때부터 받은 공중도덕 교육 역시 빛을 발해 열심히 응원하고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은 쓰레기까지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국인은 신나게 즐기면서 질서 있게 축제를 마무리하는 국민임을 전 세계에 증명했다.
월드컵이 개최된다는 이유로 한국에서의 인턴십을 결정한 미래의 남편은 축제의 분위기에서 한국을 알아갔다. 거리 응원의 매력에 푹 빠진 우리는 'Be the Reds!'라는 글자가 새겨진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축구경기가 있는 곳이면 언제나 함께 했다. 2002년 역사적 현장에 함께 했다는 유대감은 빠른 시간 안에 우리를 가깝게 만들어줬고, 친절한 사람들과 맛있는 한국 음식에 반한 미래의 남편은 한국과 관련된 많은 것을 좋아했다. 그 가운데 나도 들어있었다.
그는 나와 국적도 달랐고, 나이도 어렸고, 독일로 돌아가 학업을 마쳐야 하는 사람이었다. 슬슬 결혼 상대를 찾아야 할 나이의 내가 '안정'이라는 콘셉트로 세운 조건과는 전혀 맞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보수적인 부모님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미래가 불투명한 관계였다. 합리적으로 따져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나에게 우리 만남의 배경이 2002년 여름 월드컵 시즌이었다는 것이 마법의 가루처럼 작용한 것 같았다. "꿈★은 이루어진다" 라고 모든 국민이 희망을 노래할 때 우리의 말도 안 되는 관계는 어느새 스르르 말이 되는 관계가 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축제의 기분에 빠져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