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집에 돌아오면 가끔씩 책상 위에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그 포스트잇에는 내가 선을 볼 남자의 이름, 나이, 직장,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포스트잇에 적힌 아빠의 정갈한 글씨는 나를 놀리는 듯 얄미웠다. 나는 딸, 딸, 아들의 둘째 딸이었고, 장녀였던 언니는 나보다 더 심하게 결혼 압력을 받았었다. 부모님은 '똥차가 안 가면 뒤에 있는 동생들 길을 막는다', '아빠 퇴직 전에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못 맞추냐'는 둥의 말을 했었다. 당시에 주말마다 집안 분위기가 안 좋았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공무원이었고 엄마는 명예퇴직을 한 이후였던 것 같은데, 당시 부모님 아시는 분들의 자제들이 앞을 다투어 결혼을 하는 바람에 아빠의 월급 상당 부분이 부조금으로 나가고 있었다. 장녀로서 감당해야 했던 언니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언니 대신 부모님께 '때가 되면 결혼할 거니 언니를 좀 가만히 두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나의 항쟁은 뭘 모르는 것의 나불거림으로 치부되었고, 언니는 선으로 만난 남자, 지금의 형부와 선을 본 지 반년 만에 결혼했다. 당시 언니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 둘이 성인이 된 두 아이와 함께 아직까지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의 도래와 함께 언니의 결혼으로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기다리던 집안의 개혼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초대장을 천 장이나 찍었고, 언니의 결혼식엔 하객이 한 600명 정도 다녀갔다고 했다.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손님이 왔는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은 한이 풀린 듯 기분 좋은 날들이 지속되었다. 한 사람의 희생이 이런 가정의 평화를 가져다주다니 난 언니의 아름다운 희생에 감사했다. 나라면 끝까지 투쟁을 했을 것 같지만 장녀의 책임감은 둘째의 책임감과는 달랐던 것 같다. 나는 눈이 없어지며 함박 웃는 형부의 웃음이 좋았고, 만날때마다 언니의 만행을 고자질 하는 형부가 재미있었다. 결혼을 한 이듬해에는 귀여운 조카까지 태어나 부모님을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바람에 한동안 아무도 나에게 결혼하라고 닦달하지도 않았다.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이후 나는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조용히 준비를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며 열심히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반대가 불을 보듯 뻔했기에 말없이 그저 늙어가면서 돈을 모으기로 했다. 그러는 가운데 2년 반 후 남자친구가 다시 한국으로 일하러 들어오게 되었고, 우리는 1년간 제대로 데이트를 하며 서로를 더 알아갔다. 우리 관계는 부모님에게 비밀이었기에 나는 여전히 책상 위 포스트잇으로 선 통보를 받았고, 선은 당연히 잘 성사되지 않았다.
2005년 여름, 우리가 알고 지낸 지 3년이 되었을 때 남자친구와 나는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나 때문에 한국에 온 것이기 때문에 다시 독일로 돌아가 제대로 된 직장을 찾아야 했고, 나보다 어린 데다 겨우 1년 정도 일했기 때문에 아직 경제적인 기반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외국인 남자친구의 존재에 대해 얘기했을 때 아빠는 엄격하다 못해 마치 조선시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부모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몇 달간 나의 인사를 받아주지도 않았고, 말도 섞지 않았다. 엄마 역시 그냥 친구로만 지내라고 나를 설득했지만 나는 그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자라면서 내가 한 반항이라고는 화가 나서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일기장에 부모님 험담을 쓰는 수준이었지만 결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고, 그럴 거면 그냥 혼자 살겠다고 소리쳤다. 내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던 질문은 이랬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결혼하는가?'
엄마 생신 때 꽃을 들고 찾아온 외국인 사위 후보가 싫지 않았던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는 외국인 사위 후보를 한번 만나보자고 아빠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저 늙어가자는 나의 전략도 성공을 한 듯 보였고, 서른 살이 되자 내 예상대로 부모님은 포기를 한 것 같았다. 늙어 시집을 못 가느니 외국 놈한테라도 보내자는, 서른이라는 데드라인을 넘기지 말고 치워버리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서른 살은 여전히 창창한 나이인데도 말이다.
하루는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걔는 몇 살이니? 너보다 어리다며? 한 살 정도 어린 거야?"
"아니."
"뭐? 그럼 두 살?"
"... 다섯 살."
"미쳤네 미쳤어!"
아빠를 설득하던 엄마도 나이 차이에 할 말을 잃었는지 한동안 말이 없더니 한마디 소리를 빽 지른다.
"아빠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당시에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故) 최진실 씨 말고는 다섯 살이나 연하인 남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잘 없었다. 40년대 생인 나의 부모님이 받아들이기에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이었을지 충분히 이해를 하고도 남았다. 당사자인 나 역시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때 놀랐었다. 외국인들에게 나이를 바로 묻지 않는 것이 예의라 나이를 뒤늦게 알게 되기도 했지만, 성숙해 보이는 그의 외모와 태도에 그렇게 어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 이후 신기하게도 아빠는 나에게 남편의 나이를 물어본 적이 없었고, 아빠가 남편의 나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도 더 이상 확인해보지 않았다. 엄마가 중간에서 현명하게 해결하겠거니 하는 믿음이 있었고, 분란을 일으킬만한 화제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강경하게 반대를 하던 아빠도 태도를 바꿔 최소한의 지인만 초대한다며 청첩장을 딱 200장만 인쇄하라고 하더니, 결국에는 200장을 더 주문했다. 언니 결혼 때 청첩장 천 장을 인쇄한 것을 생각하면 외국인 사위라고 만방에 알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05년 10월에 결혼을 하고, 12월에 독일로 가게 되어 나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었고, 신변 정리를 하면서 남은 시간을 부모님과 많이 보냈다. 외국인 사위를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아빠도 일단 사위가 되니 좋아하기 시작했다. 키가 큰 것을 실속 없다고 별로 안 좋아했던 아빠는 아무리 사위의 키가 2미터 정도라고 해도 "아닌데, 한 180 좀 넘는 것 같은데." 하면서 진실을 왜곡하곤 했다. 주말에 등산이나 사우나에 사위를 데리고 다녔고, 서로 등까지 밀어줬다고 했다. 강한 여장군 스타일의 엄마는 둘째 딸이 결혼 후에 독일로 이주하게 되어도 슬픈 기색은 전혀 없었고, 외국인 사위가 생겼다는 사실을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엄마는 1999년에 둘째 딸과 단 둘이 했던 캐나다, 미국 여행의 기억을 자주 소환하며 유럽으로의 여행을 꿈꾸곤 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말이 있는데 나의 결혼이 그랬다. 국제결혼은 나의 생활 무대를 좁은 한국에서 세계로 넓혀줬다. 처음엔 그저 독일에서 살게 될 줄 알았는데 남편의 파견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살게 되었고, 한국의 서울을 거쳐 현재는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 항상 새로운 도전을 찾는 남편 때문에 앞으로 우리의 삶의 무대가 어디로 바뀔지 알 수가 없다. 똑똑하고 야망이 있는 남자가 멋있었으나 그 야망이 나를 힘들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남편의 직장에 따라 대륙을 옮겨 다니는 삶은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점점 지치기도 한다. 국제 이사 자체가 진을 빼는 과정이었고, 가는 곳마다 새로운 언어와 부딪혀야 했고,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에 언제나 유연해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이주는 아이들이 잘 적응하는 지도 살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복잡했지만 지금까지 두 아이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고 있어 다행이다.
삶의 무대가 넓어졌다고 모두 다 넓은 무대를 활용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이국에서의 삶은 살다 보면 언어장벽이나 문화장벽 때문에 위축되어 개인의 영역을 더 좁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얼마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는 그야말로 본인 하기 나름이다. 나는 내 삶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멋진 퍼포먼스를 펼쳐보고 싶다. 세계 투어를 한다고 생각해야겠다. 장소는 남편이 제공했지만 내가 기획한 퍼포먼스를 한다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